0.
재작년 이사 온 집, 내 방의 바닥은 참 묘하다. 거실과 통한 방의 초입은 편평하지만,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는 쪽의 바닥은 육안으로도 보이는 야릇한 경사가 있다. 이사를 온 첫날, 그 경사에 온 신경이 쏠렸다. 어떻게 사람 사는 방바닥을 이따위로 지을 생각을 했지. 바닥의 기울기 때문에 불편했던 심사가 슬쩍 두려움으로 변했다. 저러다 저쪽으로 콘크리트가 우르르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엔? 아파트 측에 보수 공사를 요구해야하나? 기울은 바닥을 툭툭 차며 투덜거려도 별 방법은 없다. 그런대로 살아야지 뭐. 그렇게 나는 이 집에 2년을 살았다. 기울기 때문에 2년 동안 불편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경사가 있었던가. 지금은 방의 한 구석이 기울어져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다. 기울어진 방 안에 오래 있다가 밖으로 나올 때, 편평한 바닥에서 오히려 기울기를 느낀다. 분명 불쾌하고 신경 곤두서는 기울기였는데, 그곳이 편해진 것이다.
이제 방의 기울기는 ‘아, 기울어졌지!’ 생각할 때나 느낄 수 있다.
1.
세월호는 2년의 세월을 항해해서 2016년에 정박했다. 2년의 하루하루란 누군가에게 늘 외롭고 원통한 4월 16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2년이란,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배 한 척을 잊어가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기억하기에 지나치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뉴스를 통해 차가운 바다 속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수장되는 장면을 전 국민이 지켜보았다. 실시간으로, 수없이. 앞으로도 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정부와 관계자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이 있다.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충분히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일부에서 폭언이 쏟아졌다.
세월호와 국정원의 연관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 해경의 어처구니없는 방관, 초동 대처의 허술함에 대한 생존 학생들과 민간 잠수부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국가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사건의 진상 노출을 필사적으로 막아왔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배는 인양을 준비하지만, 진실은 인양되지 못하고 있다.
2년이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은 진실, 세월호 사건의 여론은 점점 변해갔다. 유가족에 대한 보상금과 생존 학생들의 대학 특례입학에 관심이 모아졌다. 4월 16일에 벌어진 일은 ‘사고’가 아닌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국회의원들은 보상에 대해 부각시켰다. 수상하게도 말이다. ‘성역 없는 수사’, ‘진실을 인양하라’는 외침은 ‘이제 좀 그만 하자’는 말들로 바뀌어갔다.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 사람들은 유가족들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일상,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배신감을 알아버린 일상, 일상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린 일상, 잔뜩 기울어져 버린 그런 일상으로.
2.
우리는 살아있는 한 내릴 수 없는 배에 타고 있다. 어딘가 낯이 익은, 그런 배.
세월의 바다를 항해하는 그 배에는 5000만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다. 굴곡진 역사를 지나온 배에는 무수히 많은 생채기가 나있지만,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모터의 속도는 언제나 거침이 없다. 조타석의 선장과 조타수들은 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속도를 위해, 부정부패는 어쩌면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배가 통제되고 관리당하는 동안, 사람들은 더 잘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적재량이 초과되고, 비리가 난무하며 배가 기울지만, 아무도 자각하지 못한다. 배에서는 방송이 울린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따르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방송을 믿고 그대로 따른다. 배는 점점 기울었지만 자각하지 못한다.
저기, 배가 기운 것 같지 않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누군가는 외치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렇지 않다고,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면 잘 살 수 있다고. 기울기를 안정적이라 믿고, 기울기가 수반한 가파른 경사를 못 본 체 넘긴다.
어딘가 낯이 익은 배. 언제 침몰할지 모른다.
이지윤 바람저널리스트(www.bara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