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는 앞머리가 길고 수북한 곱슬인 데 반해 뒤통수는 민머리인 독특한 생김새의 신이 등장한다. 어깨와 발뒤축에는 날개가 달렸고, 한쪽 발뒤꿈치는 들려 있으며, 양손에는 칼과 저울을 쥐고 있다. 이 신의 이름은 ‘카이로스(Kairos)’다. 카이로스는 만인의 시간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수북한 곱슬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아무나 그를 알아보는 건 아니다. 알아보는 자는 이 신을 붙잡을 수 있는데, 수북한 앞머리채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을 스쳐 지나가다 아차, 하고 돌아서 손을 뻗었을 때는 잡지 못한다. 민머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신은 순식간에 새처럼 날아 올라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 ‘기회’(occasion)의 속성이 그렇지 않는가. 카이로스는 사실 ‘기회의 신’이다. 절대적이고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Chronos)와는 달리 카이로스라는 ‘기회’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적절한 순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회는 신중함을 지닌 균형적 사고와 과감한 결단 그리고 신념을 가진 행동으로 붙잡을 수 있다. 카이로스의 저울과 칼은 이를 상징한다.
주관적 판단을 전제로 말하자면, 2006년과 2007년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책임투자(SRI)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였다. 민간 기관투자자들의 사회책임투자 펀드 상품 출시가 줄을 이었고, 국민연금도 자산의 일부를 처음으로 사회책임투자 방식으로 위탁운용하기 시작했다. 장하성 교수가 주도한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일명 장하성 펀드)가 언론에 관심을 받으면서 시장과 대중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속가능성보고서도 ‘붐’을 이루었다. 2005년까지 총 19개 기관만이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발간했지만 2006년과 2007년에만 각각 12개, 25개 기관이 신규로 발간했을 정도다. 특히 2007년에만 11개의 공기업이 가세했다. 정부는 글로벌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제표준인 ISO 26000에 기업이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산업발전법’을 개정하기도 했고, 지속가능경영 자가진단 지표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SRI와 CSR에 대한 정부의 활성화 의지는 높아 보였고, 이에 따라 언론의 관심도 상승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시대의 창이 열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탄생한 후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책임투자 이슈는 ‘효율성과 수익성’에 밀려 급격히 퇴조해 계륵(鷄肋) 취급을 받았고, 경제민주화 이슈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외양만 돋보이게 하는 여러 가지 액서서리 중 하나로 전락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국민연금과 대기업들의 부패 연루는 이러한 흐름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고조되어 가던 2006년과 2007년 당시 분위기를 살려 나가고 담론의 당위성을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로 만들어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사회적 책임 철학이 빈곤하거나 박약한 정권의 탄생이라는 객관적인 조건이 크지만 주관적인 역량이 부재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책임 전성시대’를 가져올 소중한 기회를 그때 놓치고 말았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치루고 있는 2017년 장미대선 정국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2012년에 대선에 이어 경제민주화가 다시 화두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업이 해야 할 역할이 역시 강조되고 있다. 사회책임투자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경제민주화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고 이를 시장 친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기도 하다. 방법론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수와 진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드러운 혁명’이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장미대선을 앞두고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활동하고 있는 14개 비영리기관들의 협의체인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의 참여과 후원으로 제19대 대선 후보들에게 사회책임투자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5대 이슈 정책질의서를 보내고 답변을 요구한 바 있다. ▲공적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전면 시행(국가재정법 개정) ▲공적 연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전면 가입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고려한 주주권 행사 의무화 ▲국민연금 내 독립적인 사회책임투자위원회 구성과 운영 ▲기업의 ESG 정보공개 의무화 ▲CSR 국가전략 수립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만이 공약 미확정을 이유로 답변서를 보내오지 않았을 뿐 4당의 대선 후보들은 모두 답변했다.
답변을 분석한 결과, 차기 정부에서 공적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와 주주권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답변을 보내 온 4당의 후보 중 누가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추진 방법론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 4당의 후보들은 5대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도 단순히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걸로 나타났다. ‘사회적 책임 전성 시대’를 만들 기회가 다시 오고 있다. 주체적 역량도 10년 전보다는 축적되었다고 본다.
사회책임투자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투자자와 기업과 소비자와 노동자와 협력업체와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지속가능하게 상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를 실현할 기틀을 만들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은 곧 신화의 다른 이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선 후보들은 ‘사회적 책임의 시대’를 약속했다. 우리들은 그 약속 이행을 매의 눈으로 감시해야 한다.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대선 후보들의 사회적 책임 관련 공약을 규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DNA를 가진 조직으로 변화시키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필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본다.
아프리카 속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무를 심어야 할 가장 좋은 시기는 20년 전이었다. 그 다음으로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argos6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