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채용비리 파문이 금융권을 뒤흔들고 있지만, 피해자 구제와 근절방안은 여전히 요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피해자 구제 등을 실시하고 있음에도 금융권에서는 내부 규정이 없어 부정채용자의 합격 취소나 피해자 구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모습이다.
올 상반기 마련될 ‘은행권 공동 채용 모범규준(Best Practice)’ 또한 기존 부정합격자에 대한 처벌과 구제방안 마련보다는 채용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큰 틀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채용비리를 수사 중인 검찰이 지난달 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금융 본사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을 들고 빠져나오고 있다. 사진/뉴시스
15일 김태영 전국은행연합회장은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방안 간담회’에 참석 후 기자와 만나 “(부정 채용 피해자 구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아직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며 “이제 막 (채용 모범규준 관련) TF에서 논의를 시작하려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구제안의 경우) 모범규준과 방향이 조금 다르다”면서 “‘채용 모범규준’ 개선안은 향후 채용 방안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제도를 손질하는 형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은행연합회에서는 이달 중으로 시중은행 및 외부자문업체가 참여하는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해 올해 상반기 안에 채용 모범규준을 만들 방침이다. TF에는 채용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국민,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실무진 등이 참석한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아직 TF 첫 회의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하기가 어렵다”면서도 “금융감독원 검사에서 지적됐던 부분 등 공정한 채용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렇게 되면 일부 은행권에서 채용 시 참고하던 ‘VIP 리스트’나 관행적으로 실시했던 ‘임원 추천제’, ‘임직원 자녀 가산점 제도’ 등은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국민은행과 KEB하나은행,
우리은행(000030) 등에서는 은행 고위 인사나 우량 고객의 추천 명단이 담긴 특혜 채용 리스트를 관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광주은행에서는 임직원 자녀가 필기시험을 볼 때 15%의 가산점을 부여해왔다. 가산점 부여의 경우 내부 규정에 명시됐기 때문에 채용비리에 해당하지 않지만, ‘현대판 음서제(蔭敍制)’로 지적되는 만큼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기존의 부정 채용합격자 퇴출이나 피해를 본 불합격자에 대한 대책은 깜깜이다. 은행 내부 인사 규정에는 채용비리 발생에 따른 부정합격자 처리와 피해자 구제 관련 방안이 없어서다.
실제 2015년 광주은행 신입행원 채용 당시 자녀의 면접위원으로 들어갔던 임원과 인사담당 부장의 경우 퇴사를 했지만, 해당 자녀는 버젓이 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KEB하나은행과 우리, 국민은행 또한 채용비리 의혹으로 최흥식 금융감독원장과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이 사퇴하고, 관련 임원이 구속됐지만 특혜 채용자에 대한 별도의 제재는 없는 상태다.
부정합격에 따른 피해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렵고, 검찰 수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 특혜 채용자를 발본색원하는 과정이 복잡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채용 취소는 제3자의 부정청탁 행위나 본인의 부정행위가 있으면 가능하지만, 법정 분쟁 소지가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다는 게 은행권의 중론이다.
손태승 우리은행장 역시 지난 1월 특혜 채용에 대해 “검찰 수사 중인 사안”이라며 “(부정합격자에 대해)결정된 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한국가스안전공사가 채용비리 불합격자 8명을 구제하고 기획재정부에서 부정합격자 채용 취소 등 채용비리 근절 조항을 신설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현재 은행에서는 부정채용 혐의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라며 “내부 규정도 없는 상황에서 불합격자에 대한 구제안이나 특혜 채용자에 대한 채용 취소 등을 논의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이 사퇴하면서 채용비리에 대한 여파가 확대되고 있어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며 “결국은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온 후 다뤄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채용 제도 정비보다 피해자에 대한 정보 고지 등 실질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감원 채용 청탁 관련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을 맡고 있는 정민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금감원의 경우 감사원 조사 결과나 검찰 참고인 조사 과정에서 채용비리 피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일반 은행의 경우 불합격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평가했다.
정 변호사는 “당시 채용 과정에서 불합리하게 탈락한 지원자에게 (수사 상황 등을) 고지해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이미 은행권에서는 채용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블라인드 채용 등을 실시하고 있다”며 “채용 제도를 재정비하는 것보다 원칙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