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정치·경제 패러다임을 주도했던 다자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전세계적인 불평등 심화와 정치적·종교적 갈등 격화 속에 보호주의와 고립주의의 유혹이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미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진행 중인 무역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갈수록 격화되고 있고, 해외 난민 수용을 둘러싼 갈등은 미국과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간의 무역 갈등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중국 회사들의 미국 첨단기술 기업 투자를 제한하는 방침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우리는 한 대 맞으면 주먹으로 돌려준다”며 미국에 보복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역 갈등은 전통적 우방에도 예외는 없다. 철강과 알루미늄에 이어 외국산 자동차에도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면서 유럽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캐나다 등은 초비상이 걸렸다.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으로 날아가 미 정부에 의견서를 제출하는 한편 공청회 참석도 준비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캐나다 등도 보복관세를 공언하면서 일전을 준비 중이다.
불법이민과 난민에 대한 불관용 조치도 전세계를 고립으로 밀어넣고 있다.
미국 정부는 ‘비인도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멕시코 등 중남미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추방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으며 미 연방대법원은 이슬람권 5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제한하는 반이민 행정명령 위헌소송에서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다. 연방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대통령이 이민 분야에서 충분한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행정명령은 국가 안보 측면에서 정당하다고 밝혔다.
우파 민족주의정당이 집권한 헝가리에서는 다양한 반난민 정책을 묶은 패키지 법안이 압도적인 찬성속에 통과됐다. 유럽의회는 이를 맹비난하면서 헝가리에 표결권 박탈을 추진하기로 의결했으나 헝가리 정책에 동조하는 국가들로 인해 실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동안 난민 무풍지대로 여겨져 왔던 우리나라도 예멘 난민 처리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이들에 대해 인도주의적 차원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구체적으로 향후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는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외국을 상대로 빗장을 걸어잠그는 것은 21세기 현대 국가의 방식이 아니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은 자국내 여러 주정부들로부터 소송에 직면해 있으며 공화당 내에서도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국립과학연구원을 비롯한 프랑스의 경제학자와 수학자들의 연구결과 지난 30년간 서유럽 국가에 유입된 난민들은 1인당 국내총생산을 증가시키고 실업률 하락에도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고령화 문제를 해소함은 물론 세수 증가를 이끌었다는 평가다.
지난 4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을 통해 "분노는 우리를 얼어붙게 하고 약하게 만들 뿐"이라며 "세계를 향한 문을 닫아건다고 세계의 진화를 막을 순 없다"고 호소했다.
전세계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술적 진보 만으로 갈등이 해결될 수는 없다. 편견과 공포에서 한발 벗어나 국적과 인종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일방주의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전세계인이 증명해야 한다.
손정협 증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