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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저가수주, 조선업 협력사·노동자 ‘갑질’로 이어졌다
설계 역량 없이 해양플랜트 EPC 대량 수주 ‘덜컥’
입력 : 2020-01-28 오전 6:01:06
[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처음엔 ‘갑질’인지도 몰랐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돈은 주는 대로 받아 직원들 급여 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받을 돈이 예를 들어 100만원이면 최소한 82만원은 줘야 세금 내고 월급 주고 직원들 퇴직금도 주고 하지요. 적게는 37만원, 많아도 58만원만 주는데. 돈이 적다고 이의 제기하니까 ‘문제 일으킨다’면서 급한 일 처리하고 나니 쫓아내더라고요.”
 
2013년 2월 현대중공업 협력사로 합류해 공사대금 삭감에 이의를 제기하다 그해 11월 퇴출된 이재왕 전 부경엔지니어링 대표는 이같이 운을 뗐다. 이 대표는 울산 조선 현장에서 청소부터 시작해 기술을 배우고 업체장이 됐다. 이 대표가 원청과 소송을 벌이던 2014년 12월 다른 협력사 대표 A씨가 자살하면서 현대중공업 피해협력사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그가 대책위를 이끌게 됐다. 조선업 하도급 관행이 갑질이란 이름으로 수면 위에 오르던 시점이었다.  
 
2010년 전후로 조선3사가 무리해서 저가로 과다 수주한 조선해양플랜트 사업이 '부메랑'이 돼 조선업 하도급 및 기자재 업체 등 협력사에 대한 '갑질'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모습. 사진/뉴시스
 
조선 3사 해양플랜트 저가 수주 ‘치킨게임’→하도급 대금 후려치기 등 ‘갑질’로 ‘부메랑’ 
 
27일 조선업계 설명을 종합하면 최근 문제시되는 조선업 하도급 갑질의 배경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선 발주가 크게 줄자 국제유가 고공행진 속 원유 생산·시추 설비인 해양플랜트가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업계에선 우스갯소리로 “수주가 인격이다”는 말을 하던 때다. 조선3사 모두 원가·역량 검토보다는 일단 수주부터 하고보는 ‘치킨게임’에 뛰어들었고, 2012~2013년엔 국내 조선사 평균 매출의 50~75%가 해양플랜트에서 나올 정도로 산업 규모가 커졌다.
 
문제는 당시 한국 조선사들이 주로 ‘시공(Construction)’에 특화돼 있었던 반면 설계(Engineering), 구매(procurement), 설치 등에 대해서는 경험이 부족해 별다른 전문성이 없었던 상태였다는 점이다. 해양플랜트 사업 수주는 설계·조달·시공을 일괄 제공하는 EPC 방식으로 이뤄졌고, 설계 역량 부족은 제대로 된 원가분석 미비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해양플랜트가 원가 이하의 저가로 수주됐다는 지적이다.
 
건조능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과다 수주를 하다 보니 건조를 하면 할수록 손해가 쌓일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설계부실에 따라 설계변경이 잦았고, 애초에 생산스케줄 자체가 엉터리로 짜이다 보니 제 때 마치지도 못했다. 건조 과정에서 자연히 불필요한 비용이 늘어갔지만, 선주와의 관계에서 이런 비용은 모두 조선사들이 부담해야만 했다. 
 
조선사들은 하도급 업체들에 원가 절감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조선업 하도급은 물론 조선해양기자재 납품 업체들까지 줄줄이 피해를 입었다. 2016년 7월 정부가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하고 4대 보험료 체납 유예 조치를 하자, 원청은 그만큼 공사대금을 또 깎았다. 조선업 하도급 구조의 최하층에 선 하청노동자들의 4대 보험료 체납액이 수백억원을 넘겼지만, 협력업체 역시 도산하거나 많게는 수십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원청부터 시작된 위기와 갑질이 조선업 하도급업체에서 하청노동자로, 기자재 납품 1차 벤더에서 2, 3차 협력사까지 내려가며 피해가 확산한 것이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하도급 피해 대책위 관계자들이 지난 21일 한국조선해양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울산 동구를 지역구로 둔 김종훈 민중당 의원(오른쪽 세번째)과 김남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오른쪽 두번째)도 자리했다. 사진/최서윤 기자
 
“증거 없어 법적 구제 못 받아…공정위 제재도 그뿐”
 
협력업체들은 보안이 워낙 철저해 증거가 될 만한 서류를 남기지 못한 탓에 ‘선 시공 후 계약’, ‘대금 후려치기’ 등 피해를 증명할 길이 없다고 호소한다. 민사소송으로 피해를 구제받지 못한 이유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재를 가해도 그뿐이다. 2013년 공정위는 대우조선해양에 하도급대금 부당 인하 및 미지급 등으로 과징금 267억원의 과징금 부과와 미지급금 지급 명령을 했지만, 대우조선 측은 대형로펌인 김앤장을 방패로 승소해 공정위 결정을 뒤집었다. 공정위가 2018년 또 대우조선에 과징금 108억원과 검찰 고발 및 공공입찰 제한 등의 제재를 가했지만, 대우조선은 이번에도 소송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달 공정위는 현대중공업과 지주사 한국조선해양에도 과징금 208억원과 과태료 및 검찰 고발 등의 제재를 했지만, 현대중공업 역시 공정위의 ‘판결문’ 격인 의결서를 받는 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삼성중공업의 하도급 갑질과 증거인멸 등 조사 방해, 대우조선해양의 추가 건도 상정한 상태다. 삼성중공업에 대한 제재 발표는 이르면 내달 중순 나올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로도, 사법적 판단으로도 구제받지 못한 하도급 피해업체들은 거리로 나섰다. 이재왕 대표와 한익길 현 현대중공업 피해업체 대책위원장은 지난 13일부터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집 앞에서 시위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산업은행의 중재로 피해 업체들과 합의를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몇 달째 서초동 삼성그룹 사옥 근교에서 집회·시위 중인 삼성중공업 피해업체 대책위 관계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과 관련해 삼성준법감시위원회가 꾸려졌지만, 감시 대상 7개 계열사에 삼성중공업은 빠졌다”며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은 하도급 피해도 들여다본다고 해놓고 삼성중공업이 빠진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내달 출범하는 삼성준법감시위원회의 감시 대상은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7개 계열사 뿐이다. 사진은 초대 위원장으로 내정된 법무법인 지평의 김지형 대표 변호사가 지난 9일 기자 간담회를 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
 
최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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