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고미 거버넌스 2026.09.04

신뢰를 배신한 영웅의 귀환

영화 〈오디세이〉에서 자꾸 반복되는 말이 있다. ‘Zeus’ Law’. 처음에는 고대 그리스의 환대에 관한 오래된 규칙쯤으로 들린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먹이고 재우며 보호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영화에서 이 말은 전혀 다른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절이 아니라 신뢰에 관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xenia)’에서 주인과 손님은 서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낯선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대신, 손님 역시 주인의 호의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이 오래된 규칙을 대사로만 설명하지 않고 쿠세니아를 깨뜨리는 인간들의 행동을 보여준다.

 가장 선명한 장면이 트로이 목마다.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인다. 그들에게 그것은 적군의 무기가 아니라 신께 드릴 선물이었다. 환대와 신뢰는 함정으로 바뀌고 오디세우스는 적이 믿고 있던 규칙을 이용해 뛰어나고 영리한 전략으로 승리하지만 신뢰를 악용한 잔인한 영웅이 된다. 승리 이후의 오디세우스는 길고 고통스러운 귀환의 길에 선다. 전쟁터에서 박수받던 영웅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관객은 그의 승리가 남긴 대가를 보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았지만 자신의 지략을 자랑스럽게만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이용했고 무엇을 파괴했는지를 깨닫는 고통스러운 여정이 기다린다. 〈오디세이〉의 귀환은 단순한 모험의 결말이 아니라 ‘승리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감당하는 과정이다. 이 영화에서 환대는 그래서 중요하다.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하자는 훈훈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가 최소한의 규칙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면 공동체 자체가 위험해진다는 이야기다. 폴리페모스가 손님을 먹어치우는 장면이나, 이타카에서 손님이라는 지위를 악용하는 구혼자들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주인이 환대를 거부해도 문제지만, 손님이 환대를 권리처럼 착각해도 질서는 무너진다.

 이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비결이 많지만 특히 오늘의 우리 사회를 꽤 불편하게 건드리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법과 제도를 민주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민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법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상대도 나와 같은 규칙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신뢰다. 내가 다수일 때는 절차를 존중하다가 소수가 되는 순간 절차를 부정하고, 내가 권력을 가졌을 때는 원칙을 외치다가 권력을 잃으면 같은 원칙을 공격한다면 민주주의의 외형만 남는다.

〈오디세이〉가 흥미로운 이유는 오디세우스를 완벽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승리를 위해 타인의 신뢰를 이용했던 인간이다. 영화는 그 모순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긴 귀환의 시간 속에 남겨둔다. 그래서 이 영화를 ‘영웅의 귀환’보다 ‘영웅 신화에 대한 질문’으로 해석된다고 본다. 승리했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적을 속였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지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승리하는 방법 자체가 그 사회가 지켜온 질서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Zeus’ Law’도 거창하지 않다. 내가 상대에게 요구하는 규칙을 나 역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권리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지금의 승리를 위해 내일 모두가 믿어야 할 신뢰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무너뜨리고 결국 이타카로 돌아간다. 그러나 영화가 묻는 것은 그가 집에 도착했느냐가 아니다. 그가 과연 자신이 떠날 때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기는 것이 다가 아니라 옳은 방법으로 이겨야 진정한 승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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