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한국사의 서로 다른 장면이 겹치는 날이다. 이순신의 명량대첩,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청산리대첩,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이 모두 이 날짜와 연결된다. 영화 《하얼빈》을 보며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다시 생각하다 다른 사건들에도 눈길이 갔다. 흥미로운 우연이다. 그러나 날짜가 같다고 역사의 의미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주도한 일본의 핵심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자신의 행동을 개인적 원한에 따른 살인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거로 설명했다. 체포된 뒤에도 자신을 독립을 위해 싸운 의병으로 규정했다. 하얼빈역의 총성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한국인의 저항을 세계에 알린 사건으로 남았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청산리 일대에서는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김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연합부대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청산리대첩은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군의 조직적인 무장투쟁 역량을 보여준 승리였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독립을 향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독립군은 열세한 조건에서도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597년 명량대첩도 오늘날의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26일이다. 이순신 장군은 음력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열세한 전력으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한 뒤 거둔 승리였다. 이 전투를 이순신 한 사람의 영웅담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수군을 재건하고 군량과 전선을 마련한 백성, 함께 싸운 장수들의 노력도 승리를 뒷받침했다. 기록에는 장군의 이름이 크게 남지만, 전쟁을 버텨낸 것은 수많은 사람의 힘이었다.
1979년 10월 26일에는 전혀 다른 총성이 울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 유신체제 아래 정치적 자유는 억압됐고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발도 커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죽음은 유신체제 종식의 계기가 됐지만 민주주의의 정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고, 이듬해 5·18민주화운동은 유혈 진압을 겪었다. 독립을 위한 의거와 독재정권 내부에서 벌어진 대통령 피살은 총성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네 사건을 한데 조명하는 행사가 ‘10·26탕탕전’이다. 2021년 시작된 이 행사는 명량대첩과 안중근 의거, 청산리대첩,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을 함께 놓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 ‘탕탕’이라는 이름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네 사건을 하나로 묶는 순간, 무엇을 공통점으로 보고 어떤 차이를 남길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날짜의 우연을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다만 흥미로운 우연이 역사적 차이를 가리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날짜가 겹치는 이유도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 명량대첩은 음력 9월 16일에 벌어졌고, 오늘날의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26일이다. 청산리대첩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여러 전투가 이어진 사건이므로 마지막 날만을 떼어 전체 전투의 의미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각 사건의 날짜는 당시의 기록과 사건의 경과를 기준으로 이해해야 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이 같은 날짜에 놓였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의미의 동일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명량대첩은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 전투였고, 안중근 의거와 청산리대첩은 식민 지배에 맞선 독립투쟁이었다. 10·26 사건은 권위주의 정권 내부에서 발생해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온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들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총성이라는 외형만으로 같은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총을 쏘았는지만이 아니다. 무엇에 맞서 어떤 선택을 했고, 그 행동이 이후 역사에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살펴야 한다.
10월 26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총성의 크기나 날짜의 우연에 있지 않다. 명량해협에서는 나라를 지키려는 싸움이 벌어졌고, 하얼빈과 청산리에서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반면 1979년의 총성은 독재정권 내부의 권력 갈등 속에서 울렸다. 같은 날짜에 일어난 사건이라도 그 목적과 결과는 다르다. 날짜를 연결고리 삼아 역사를 돌아보되, 서로 다른 선택과 시대적 맥락까지 하나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