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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기 거버넌스 8시간 전

사랑을 노래한 비틀즈, 혁명 앞에서 묻다

비틀즈를 좋은 노래를 많이 만든 밴드라고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음악에는 사랑과 평화에 대한 희망뿐 아니라 기성세대의 질서에 대한 의심도 담겨 있다. 1967년 발표한 ‘All You Need Is Love’와 이듬해 발표한 ‘Revolution’을 함께 들으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한 곡은 사랑으로 세상을 연결할 수 있다고 노래하고, 다른 곡은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묻는다.

1968년 5월, 프랑스의 거리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대학의 권위주의와 경찰의 강경 진압에 반발한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우며 저항했다. 5월 13일에는 노동자들도 총파업에 나섰고, 파업과 공장 점거는 전국으로 번졌다. 학생들은 대학과 사회의 낡은 규범에 맞섰고, 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조건, 직장 내 권위주의를 문제 삼았다. 서로 다른 요구였지만 기존 질서가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지 묻는다는 점은 같았다. 프랑스의 68혁명은 대학가의 시위를 넘어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전후 경제성장으로 생활수준은 높아졌지만 사회의 중요한 결정은 여전히 권력층과 기성세대가 주도했다. 대학생은 늘었어도 대학의 운영은 권위적이었고, 베트남전은 국가가 내세우는 명분이 개인의 생명보다 앞설 수 있는지 묻게 했다. 청년들이 바꾸려 한 것은 정권만이 아니었다. 학교와 직장, 가정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권위와 규범까지 문제 삼았다.

혁명이 곧 새로운 체제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프랑스 정부는 총선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았고 파업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거리에서 제기된 질문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학과 직장의 권위주의,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프랑스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정권을 바꾸지 못했다고 해서 사회를 흔든 시도까지 실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비틀즈가 68혁명을 이끈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음악에는 청년들이 낡은 가치관에 의문을 품던 시대의 공기가 스며 있었다.

‘All You Need Is Love’는 1967년 6월 25일 국제 위성 생중계 프로그램 ‘아워 월드(Our World)’에서 처음 공개됐다. 전쟁과 냉전으로 세계가 갈라져 있던 때였다. 비틀즈는 복잡한 정치적 구호 대신 사랑과 연대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택했다. 국경과 언어가 달라도 음악으로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당시 이 노래가 전한 낙관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노래한다고 전쟁이 멈추고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듬해 발표된 존 레넌의 ‘Revolution’은 이 문제를 파고든다. 레넌은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파괴를 앞세우는 태도에는 의문을 던졌다. 변화를 외치는 사람에게 무엇을 바꾸려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감수할 것인지 묻는 노래였다.

‘Revolution’은 발표 형태에 따라서도 인상이 다르다. 1968년 싱글로 발표된 록 버전은 거친 기타 사운드와 강한 리듬으로 저항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반면 앨범 《The Beatles》에 수록된 느린 버전은 한층 무겁고 불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같은 노래라도 편곡과 표현에 따라 혁명을 바라보는 감각이 달라진다. 레넌의 메시지를 단순히 혁명에 반대하는 주장으로만 읽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레넌의 태도에는 반론도 가능하다. 기존 권력이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면 폭력을 경계하자는 말이 결국 현상 유지를 돕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불평등한 질서가 저절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은 계속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고 혁명이라는 명분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낡은 권력을 무너뜨린 뒤 새로운 권력이 또 다른 억압을 만든다면 무엇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68혁명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답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학생과 노동자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가졌고, 사회를 바꾸는 방법을 두고도 의견이 갈렸다. 레넌의 노래가 이들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변화를 이루는 방법에 대한 판단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드러낸다.

나는 68혁명을 평가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보다 사람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의 권위주의와 노동 현장의 불평등,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을 외면하면 저항이 일어난 이유를 놓친다. 동시에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동을 옳다고 할 수도 없다. 무엇을 바꾸려 했는지,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 피해가 돌아갔는지, 변화 이후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나아졌는지를 따져야 한다.

비틀즈는 혁명을 대신하지 못했다. 사랑을 노래한다고 현실의 모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혁명을 외친다고 더 나은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도 아니다. 두 노래가 함께 남긴 것은 간단한 해답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무엇까지 정당화할 것인가. 낡은 질서에 맞설 용기와 새로운 질서에 책임지는 태도는 함께 가야 한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비틀즈의 노래가 유효한 까닭은 이 질문에 아직 누구도 최종 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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