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한님·심수진 기자] "민간택배사들은 '정부 기관이 규범적으로 운영해줘야 하는데, 우본도 안 하면서 자기들더러 이걸 지키라고 하냐'고 합니다. 우체국 때문에 민간택배사들과 어렵게 합의한 것이 다 뒤집히게 생겼습니다. '민간택배사들 합의는 끝났고 우체국만 남았다'가 아닌 거죠." (김태완 전국택배노조 수석부위원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 소속 우체국택배 노동자들이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포스트타워 로비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진경호 택배노조 위원장 등이 포스트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우정사업본부(우본)의 불참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민간 택배사들이 우본이 빠지면 '가 합의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기 때문이다. 택배 노동자들은 우본이 1차 사회적 합의문에 서명했던 점을 들며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1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사회적 합의가 최종합의에 이르지 못한 책임은 우정사업본부에 있다"며 우본의 2차 사회적 합의 참여를 촉구하는 내용의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위원회는 "우체국 택배사인 우본이 1차 사회적 합의의 기본 취지인 '분류작업은 택배사의 업무이며 불가피하게 택배 노동자에게 분류작업을 전가할 시 응당한 분류 수수료를 지급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어 2차 사회적 합의 도출에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했다.
진경호(가운데) 전국택배노동조합 위원장, 유성욱 택배노조 CJ대한통운본부장,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등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사회적 합의기구 회의 도중 휴식시간을 이용해 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사진·뉴시스
앞서 지난 1월, 택배 노동자의 처우 문제가 사회적 갈등 이슈로 치닫자 택배사와 우본, 택배노조는 택배 분류 작업을 택배사의 업무로 보는 데 합의했다. 이른 바 1차 사회적 합의다. 당시 합의에는 지금까지 택배기사가 해왔던 분류 업무를 추가 인력 고용으로 해결하거나 분류 수수료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이후 우본과 택배사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6월 택배 노동자들이 전체 파업에 나서면서 갈등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민간 택배사와 노조는 장시간 대화를 거쳐 지난 16일 2차 사회적 합의 '가 합의안'을 만들었다.
2차 사회적 합의에서 우본 쏙 빠져
문제는 우체국 택배를 담당하는 우본이 이 대화에서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우본은 이들의 가 합의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가 합의안의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기존 1차 사회적 합의 중 분류 업무 인력의 추가 고용과 분류 수수료에 대한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우본은 지난 16일 우체국 소포위탁 배달원과 민간 택배기사의 근무조건을 비교해 공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배달물량 100개 이상 배달원을 조사한 결과에 근거할 때 우체국 소포위탁 배달원의 근무조건이 민간 택배기사보다 훨씬 양호하다며 따라서 가 합의안에 따를 수 없다는 게 우본의 입장이다. 이는 결국 갈등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택배노조는 우본이 주장하는 근무 시간에 대해 현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최승묵 집배노조위원장은 "원청인 우본이 하청인 물류지원단에 단순 물량을 떠넘기고 있는데, 제대로 된 현장 실사를 하지 못해 그들의 노동시간이나 처우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라며 "이런 수치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본이 계속해서 논점 흐리기를 하고 있다는 게 택배 노조의 주장이다. 노조가 우본에 요구한 것은 분류 비용이나 노동 시간에 관련된 것이 아닌 '분류작업이 누구의 업무냐'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라는 입장이다. 윤중현 전국택배노조 우체국본부장은 "저희는 사회적 합의문에 대한 우본의 입장만 확실하게 알면 된다. 우리의 질문은 분류 작업이 누구의 업무냐는 것"이라면서 "이조차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지난 1월 1차) 사회적 합의문에 서명은 왜 했는지, 이 합의가 우본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고 싶은 것이다"고 일갈했다.
우체국 소포위탁 배달원과 민간택배기사의 근무조건 비교. 자료/우정사업본부
민간택배사 "우본이 불참하면 우리도 수용 못 한다"
택배 노동자 사회적 합의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측은 우본 때문에 2차 사회적 합의가 무산될 수 있다는 노조의 우려가 과하다고 말한다. 이미 우체국도 사회적 합의기구에 들어와 있기에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실 관계자는 "민간 택배사와 우체국 택배의 구조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합의안에 뭉뚱그려 넣기 어려워 구체적인 이행 사항을 따로 교섭해야 할 문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택배 대란이 이어지면서 소비자 불편이 가중되는 가운데, 일단 택배노조는 이날부터 업무에 복귀했다. 우체국 소포위탁배달원들도 2차 사회적 합의 가부간의 결정에 관계없이 오는 18일부터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다. 을지로위원회 측의 설명과 달리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롯데택배 등 민간택배사들은 우본이 합의하지 않으면 잠정 합의에 이르렀던 2차 사회적 합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물류협회 관계자는 "우본이 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민간 택배사만 분류 작업을 별도로 하게 되면 가격 인상 문제에 직면한다"며 "우체국 택배만 가격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에 민간 택배사가 이를 수용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택배업계 노사가 정부, 여당의 중재안에 잠정 합의함에 따라 택배노조가 파업을 철회한 17일 서울 송파구 서울복합물류센터에서 택배노동자들이 배송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배한님·심수진 기자 bh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