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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명문가)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 우당의 가문
독립운동 자금 전재산 600억 쾌척
입력 : 2022-02-28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윤민영 기자] 전 세계적인 추세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더욱 가속화 됐다. 그런만큼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국가와 세대를 막론한 화두다. <뉴스토마토>는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일제 치하 독립운동 가문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되새기고자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하는 이번 연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진지한 화합의 의미를 찾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이 생전 강조한 말이다. 우당 선생과 그의 다섯 형제가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은 재산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이다. 우당 선생의 생전 신념을 우당의 가문이 오롯이 받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회영 가문은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으로 알려졌다. 우당 선생의 형제들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경주이씨 백사공파)의 10대손이자 판서 이유승의 아들이다. 이 가문의 업적을 현대에서는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부른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우당 선생을 포함한 6형제는 수십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서간도)로 이주했다. 가족의 이주를 이끈 인물이 바로 넷째인 우당 선생이다. 
 
6형제의 서간도 망명 논의. 사진=서울시
 
우당 선생은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동시에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목표였다. 선생은 고종의 매부인 조정구 대감과 그 아들 조남익을 통해 고종황제와 소통해 해외 망명을 내약 받은데 이어 고종의 측근인 민영달로부터 5만원을 받아, 북경에 행궁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종이 승하하고 고종의 망명 계획을 알아 챈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사건으로 전 국민이 분노하며 3·1운동이 전개됐다. 선생은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독립선언 민족대표 중 한명인 한용운 선생과 대규모 대중봉기 및 독립선언 계획을 협의하고, 3·1일 거사 직전에 망명계획을 추진한 조정구, 조남익 부자와 함께 북경으로 망명했다.
 
이시영·이동녕 선생과 3·1운동 확대
 
우당 선생은 북경에서 이시영·이동녕 선생 등과 3·1운동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4월에는 이들과 함께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이후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신채호 선생 등과 북경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통의부와 의용군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하고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합작으로 항일구국 연맹을 결성해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은 아나키즘이라고 불리는데, 제국주의와 침략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적이고 분권적인 작은 정부를 세워 자유와 평등, 인권을 보장하려는 정치사상이다. 우당 선생은 1922년부터 북경에서 '행동하는 자유주의' 운동을 펼치며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비밀행동조직인 다물단,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친일파 암살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 운동에는 신채호 선생도 참여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왼쪽)과 아내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이은숙 여사. 사진=우당기념사업회
 
"잘해야 일중식…생불여사로다"
 
우당 가문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선생의 아내 고 이은숙 여사(1889∼1979)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여사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별세한지 39년만에야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됐다. 남편이 서거한 뒤 56년 후의 일이었다.
 
선생과 결혼한 지 2년만인 1910년 12월 돌도 안 지난 딸을 품에 안고 서간도로 간 여사는 1975년에 펴낸 독립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에서 "잘 해야 일중식(하루 한 끼만 먹음)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로다"고 적었다. 당시의 궁핍하고 참혹했던 독립운동가 가문의 아내이자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짙게 배어 있는 말이다. 
 
백두산 쏘베차의 백서농장에서 농사일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모습. 현재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서 설립
 
우당 가문의 독립운동은 '신흥무관학교'가 대표적인 키워드다. 우당 선생과 그의 형제, 자제들은 재산뿐 아니라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가족 전체가 독립운동가였다. 1911년 6월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신학문과 군사교육을 시작했다. 1920년 해산이 될 때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 3500여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배출했다. 
 
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대전자령 전투 등 모든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할 때 지휘관들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이 과정에서 6형제와 그의 자제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모진 고문 등으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첫째 이건영의 둘째 아들인 이규면은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상해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은 만주에서 귀국 후 공군 대위로 복무하다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2016년 11월 17일 오후 서울 중구 상동교회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4주기 추모식 및 우당장학금 수여식에서 손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오른쪽부터) 의원,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 등 참석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우당 가문 첫째 아들도 한국전쟁 때 실종
 
둘째 이석영은 6형제 중 가장 재산가였는데,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든 재산을 쓴 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다 상해 빈민가에서 아사 순국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도 중국에서 독립운동 중 병사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었던 셋째 이철영도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넷째인 이회영 선생은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중국에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뒤 사망했다. 이 선생의 셋째 아들인 규창은 친일파 암살에 가담했으나 13년 징역 살이 후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막내인 이호영은 만주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아들 이규황, 이규준과 함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이후 조선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지낸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우당 선생은 순국한 후 30년이나 흐른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과 이종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우당 선생의 손자들이다.
 
윤민영 기자 min0@etomato.com
 
윤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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