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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가게가 사라진다①)단골도 노맥문화 원조도 소용없었다…스러진 을지OB베어
(16주년 창간기획)
입력 : 2022-05-11 오전 6:00:16
'백년가게'가 사라질 위기다. 을지로 노맥거리(노가리+맥주 거리)가 생겨나게 한 터줏대감 '을지OB베어'는 백년가게(30년 이상의 업력을 지닌 소상공인 및 소·중기업을 발굴해 100년 이상 존속·성장할 수 있도록 육성하고자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정)로 선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주와 기나긴 갈등 끝에 가게를 비우게 됐다. 시민들은 상생정신을 저버리고 무리하게 재산권을 행사한 건물주를 비난하고 있지만, 법원 판결과 강제 철수를 되돌리기는 힘든 상황이다. 문제는 이같은 위기에 처한 곳이 을지OB베어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하나 둘 폐업 수순을 밟고 있는 백년가게의 현실적 상황, 그리고 백년가게 정책의 현재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짚어본다. 향후 <뉴스토마토>는 자생력을 키워가며 진화하고 있는 백년가게의 사례까지 짚어볼 계획이다. [편집자주] 
 
[뉴스토마토 이보라 기자] '힙지로'(힙한 을지로)명물인 을지OB베어가 사라졌다. 1980년 12월 문을 연 이곳은 당시 동양맥주의 브랜드였던 OB베어를 내건 프랜차이즈 2호점이었다. 생맥주가 생소하던 시절 냉장숙성된 생맥주와 노가리를 하루에 정해진 양만 판매했다. 을지OB베어 주위로 다른 가게들이 하나둘 자리하면서 노가리 골목이 형성됐고 이른바 '노맥(노가리+맥주)' 문화의 시초가 됐다. 을지OB베어는 오후 10시면 어김없이 문을 닫았고, 다른 나머지 가게들이 남은 시간을 채우며 노맥을 팔았다. 서울시는 노가리 골목의 가치를 인정해 을지OB베어를 서울미래유산(2015년)에 선정했으며 호프집으로는 최초로 백년가게(2018년)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를 뒤로 하고 지난달 21일 새벽 을지OB베어는 40여년간 뿌리를 내렸던 을지로3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임대료를 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리를 빼달라는 건물주의 입장은 완강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이라는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한 법원 판결에 서울시와 중기부로 대표되는 '나랏님'도 한 발 물러섰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OB베어 인근에 명도집행을 규탄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사무소는 을지OB베어 건물에 강제집행을 실시해 부동산인도를 완료했다.(사진=뉴시스)
 
을지OB베어를 지키려는 사람들만 거리에 남았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옥바라지선교센터 등의 단체들이 나서 저녁마다 현장예배를 하고 피켓팅 및 행진, 기도회 등을 열고 있다. 건물주인 만선호프를 규탄하며 시민들의 현장 참여도 독려 중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을 중심으로 '서울미래유산과 백년가게를 버린 정부'를 비판하고 노가리 골목의 상생을 외치고 있다. 40여년된 노포가 스러지자 정치인들도 모여들었다. 지난 4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가 이 일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홈페이지에는 아직도 을지OB베어가 백년가게 우수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2019년 9월 백년가게로 지정된 서울 중구의 '금강 보글보글 섞어찌개'도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파고를 넘지 못한 까닭이다. 창업일은 1987년으로 기록돼 있지만 실제 창업은 그보다 10여년 전인 1970년대로 추정되는 이곳은 40년 이상된 식당으로서 명동 인근 직장인의 발길을 사로잡던 곳이다. 고기를 넣은 빨간 육수에 떡, 소시지, 오징어 등의 재료를 추가해 넣을 수 있는 섞어찌개가 대표메뉴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명동에 외국인 관광객 등 방문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가게를 유지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근처의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된 비빔밥 집인 '전주중앙회관' 명동점도 지난해 폐업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백년가게는 총 1158개사, 백년소공인은 732개사다. 올해 중기부는 200개사의 백년가게와 150개사의 백년소공인을 신규로 지정해 총 76여억원의 예산을 지원한다. 백년가게는 업력이 30년 이상된 소상공인 및 소·중기업을 발굴해 100년 이상 지속가능하도록 육성하고 성공모델을 확산하기 위한 사업이다. 이에 선정되면 컨설팅과 교육, 홍보 등을 지원받으며 혁신형 소상공인자금 융자시 금리 우대를 받을 수 있다. 2018년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지만 올해 5월 현재 이 가운데 총 5곳이 취소됐다. 두 곳은 대표자 사망으로 인한 취소였으며 금강 보글보글 섞어찌개를 비롯한 세 곳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악화, 임대료 갈등 등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다. 
 
우리나라 소상공업계는 '다산다사(多産多死)'형 구조로, 장수 소상공인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2018년 전국사업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통계분석을 실시한 결과 전체 소상공인 가운데 업력 30년 이상의 장수 소상공인은 11만302개로 전체의 3.5%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50년 이상은 2504개로 0.1%였으며 100년 이상 된 사업체는 27개로 0.001%에 그쳤다. 
 
이보라 기자 bora11@etomato.com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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