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썩철썩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뿐 한적하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날도 바람이 심하게 불었을까? 미라이 마을에 서니 인간성에 대한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바로 이곳에서 전 세계 모든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킨 대학살이 벌어졌다.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전쟁이라 불리는 베트남 전쟁은 영혼을 잃은 인류가 저지른 더러운 전쟁이었다. 영화처럼 마약에 취한 어린 병사가 헤드폰을 귀에 걸치고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면서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지금도 미국이 이라크에 미사일 공격하는 장면이 CNN을 통해서 생방송이 되고, 시민들은 바에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손뼉 치는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전쟁을 받아들이는 맹목적인 애국심이 미국 시민들의 도덕심은 불구가 되어가고 있었고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미쳐가고 있었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무엇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가, 누가 옳은가, 전쟁의 목적과 성격, 명분은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전장에서는 맹목적인 증오와 광기만이 지배하게 된다.
1968년 3월 16일 아침 꽝응아이 성의 미라이 마을에서 윌리엄 로스 켈리 중위는 소대원 26명과 함께 504 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위령관 안에는 당시의 참혹했던 장면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학살 사건 중 유독 이 사건만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이 사진이 전하는 생생한 증언 때문이었다.
17명의 임산부와 어린이 173명 그리고 5개월 미만의 유아 56명도 미친 학살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일부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했으며 시체 중 일부는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한 채 발견되었다. 한 노인은 총검으로 난자당했으며, 어떤 이는 우물 속에 던져진 다음 수류탄 세례를 받았다. 한번 집단 분노조절 장애를 겪은 병사들은 물불을 안 가렸다.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적이 제일 무섭다. 미국 병사들은 민족해방전선 전사(베트콩)들의 게릴라전에 맞닥치자 극도의 공포에 빠졌다. 전선이 뚜렷하지 않았고 적은 애매모호했다. 전황은 점점 나빠졌다. 공포에 빠진 병사들은 이성의 끈을 놓았다. 자기들 실수로 부비트랩에 걸려 사상자가 나자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평화로운 민가에 총을 쏘며 들어가 살생을 벌이고 강간과 약탈, 방화를 자행했다.
미군을 비롯한 한국군 등 동맹군은 적이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일정 구역에 민간인을 몰아놓고 수용하여 전략촌을 만들어 집단수용했다. 그 이외의 지역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수색 섬멸 작전을 펼쳤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미라이 학살이 증명하듯 작전 중인 미군은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베트콩’으로 간주했다. ‘어린 아이도 첩자’이며, “놓치는 것보다 죽여 없애는 게 낫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은 학살이 일어나기 이틀 전 인근 지역을 작전 중이던 미군들이 자기들의 실수로 부비트랩에 걸려 사상자가 발생했다. 부비트랩은 폭발음과 함께 미군의 인류애와 평정심을 날려버렸고 광기만 남겼다. 어쩌면 전쟁 그 자체가 그런 것들을 파괴하는 속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집단 분노장애를 겪고 좀비같이 살상을 벌이던 그 현장에 인간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 미군 병사는 이 잔혹한 학살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발에 총을 쏘았다. 또 한 사람은 작전을 지원 나온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준위이다. 그는 헬기를 조종하다가 광란의 현장을 목격하고 무선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눈앞에서 동료들의 눈에서 좀비의 눈처럼 섬뜩한 광채를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곳에 헬기를 착륙시키고 부상자와 시체를 실으며 켈리 중위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켈리는 작전을 수행 중이니 방해하면 발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할 수 없이 헬기로 돌아간 톰슨은 계속 현장을 주시하던 중 가까스로 몸을 숨기고 있던 베트남 양민들이 미군에 발각되는 것을 본다. 총을 들이대려는 미군들을 보면서 톰슨은 자신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한다. “착륙한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새끼들은 쏴 버려. 다시 말한다. 불복하면 쏴 버려.” 헬기는 마치 천사처럼 미군들과 양민들 사이에 착륙했다. 톰슨 중위는 사격중지를 부르짖었고 기관총 사수들이 미쳐 날뛰는 미군을 겨누는 가운데 그는 민간인 10여 명을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베트남을 방문하여 자신이 살린 소녀를 만나서 그날을 회고했다. “아마도 내가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나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하던 그 순간이었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새끼들은 쏴 버려. 다시 말한다. 불복하면 쏴 버려.” 참 냉정한 말이지만 가장 용기 있고 아름다운 말이었다.
자칫 묻힐 뻔한 미라이 학살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1년이 지난 뒤였다. 기자 지망생 병사 라이덴아우어가 찰리중대의 한 병사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이 얼근하게 취한 병사에게서 미라이 학살에 대해 무용담을 펼치듯이 떠벌이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집요한 추적 끝에 찰리중대의 다른 병사들의 만나 학살의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제대 후 이 사건을 정부에 제소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 프리랜서 탐사보도 기자인 세이무어 허쉬가 기사를 쓰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기사를 보도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허쉬는 여러 신문사를 찾아가 학살현장사진을 제시하면서 기사게재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힌 공로로 1970년에 퓰치처상을 받았다. 그 기사로 베트남전의 참혹한 실상이 알반 미국 시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미국 내 반전(反戰) 여론이 고취됐고 결국 미군 철수로 이어졌다. 그는 ‘펜으로 미군의 베트남 철군을 이끌어냈다’고 평가받는다.
제단 앞에 향불을 피우니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바람 속에 반전운동 가수 존 바에즈의 노래 ‘도나도나’가 들리는 듯 했다.이 노래는 시장으로 팔려가는 한 마리 송아지가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며 새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유태인들이 나라 없이 떠돌면서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운율로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던 곡이었다. 늘 마틴 루터 킹 목사 옆에서 ‘우리 승리 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부르며 사람들의 합창을 이끌던 그녀였다.
모든 어머니들은 착하고 귀한 아들을 군대에 보낸다. 미라이 사건에 연루된 한 병사의 어머니는 재판장을 나서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는 착한 아들을 군에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내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다. 미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수단인 전쟁이 모든 착하고 귀한 아들들을 살인자, 좀비로 만든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조헌정 목사와 평화달리기 31일차인 지난달 31일 베트남 미라이 학살 추모관에서 묵념하고 있다.(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