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판결문 첫 장의 ‘주문’에 등장한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쓴 다음 괄호를 치고 이렇게 쓴 겁니다. 이 표현때문에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판사 출신 변호사들로부터 “판결문이 장난이냐”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 1월 12일(목) 토마토Pick은 이 논란을 정리해봤습니다.
어려운 판결문
2019년 한국법제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0명 중 76명 이상이 법률 용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응답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판결문을 보고 곧장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판결문에 빼곡히 나열된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각한다.', '정함이 없다', '당사자적격', '누범가중', '원고', '피고', '피고인' 등 전문 용어가 가득합니다. 법조인들도 "국민이 보기에 재판 용어가 외계어"라고 말하며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쉬운 판결문이냐? 이상한 판결문이냐?
논란이 된 판결문은 청각장애인 A씨가 서울 강동구청장을 상대로 낸 장애인일자리사업 불합격처분 취소 소송에서 등장했습니다. A씨는 수어 통역이 필요한 자신에게 면접 당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며, 자신이 다른 장애인과 동일한 면접 시간을 배분받은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판부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경우 통상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지리드로 구성된 이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A씨는 탄원서를 통해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 재판부가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며 화답한 겁니다.
☞관련기사
‘이지리드(Easy Read)’ 판결문이란
'이지리드'는 단문과 동사 위주의 쉬운 문장과 구어체, 그림 등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법률 용어 대신 실생활 용어로 판결문을 구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논란을 일으킨 이 판결문은 이지리드 방식과 기존 판결문 방식, 두 가지 모두 담겨있습니다. 기존의 판결문 형식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지리드 방식으로 쓰인 것은 기존 판결문을 보다 알기 쉽게 요약한 버전입니다. 총 12페이지로 구성됐는데 이지리드방식이 4쪽, 기존 판결문 방식이 8쪽입니다.
기존 판결문과 새로운 판결문 비교
-그림을 동원한 쉬운 판결문 : 이번 사건의 주요 쟁점 사항인 '평등원칙 위배'에 대한 설명은 그림 두 개를 제시해 이해를 도왔습니다. 세 사람이 축구 경기를 보는 모습인데요, 한쪽은 모두 같은 높이의 발판이고 다른 쪽은 키를 배려한 높이의 발판을 딛고 섰습니다. 재판부는 이 그림을 가리키며 "그림과 같은 상황이 원고가 겪은 상황이라면"으로 가정하고 "이 부분을 세심하게 살폈다"고 밝혔습니다. 반면 기존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 처분이 중증 장애인에 대한 불공정한 선발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위법한지 여부에 관한 판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판결 이유 : 왜 이런 판단이 나왔는지 설명한 부분에서도 이지리드 방식에서 재판부는 “(원고의 상황은) 앞에서 본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발 받침대의 높이가 모두 같지만 세 사람 모두 경기를 관람하는 데에는 장애가 없는 높이인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반면 기존 방식에서 재판부는 "피고가 이 사건 장애인 일자리 사업 대상자 선발 절차를 진행함에 있어 중증 장애인인 원고에게 충분한 조력을 하지 않고 불리한 조건하에서 면접을 하는 등으로 불공정하게 진행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시민들은 환영, 법조인들은 엇갈려
-일반 시민 : 이번 판결에 대해 누리꾼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장애인이 아니어도 판결문은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좋은 판사님께 감사한다", "강우찬 판사님의 당사자 존중과 배려 감사합니다", "그냥 평소에 쓰는 용어 쓰면서 재판해도 아무 문제 없을 텐데" 등의 의견을 내놨습니다.
-법조인 : 법조인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한 재경지법 부장판사는 “법률적 쟁점을 명확히 하고, 이에 따른 판결이 이뤄져야 하므로 기존 어법을 바꾸는 것 자체는 이뤄지기 어렵다”며 "법률 용어가 아닌 일상 어휘를 쓰는 것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혼돈을 줄 수도 있다"고 부정적인 뜻을 밝혔습니다. 반면 다른 재경지법 판사는 "이지리드 형식 판결문이 늘어나고 정착되면 좋지 않겠냐"라며 "개별 판사의 판단이 아닌 법원 예규로 장애인을 위한 이지리드 형식이 권장된다면 이 같은 판결문도 늘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향후 전망
대법원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판결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1991년 ‘판결서 작성 방식의 개선을 위한 참고 사항’ 예규를 신설했습니다. 해당 예규는 "법률전문가가 아닌 당사자도 이해하기 쉽도록 판결서에는 되도록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은 되도록 짧게 세분하여 간명하게 작성하도록 한다"고 돼 있습니다. 2020년 10월부터 1년간 '판결문같이 읽기'라는 카드뉴스를 매달 제작해 판결문을 쉬운 말로 설명한 적도 있습니다. 이번 판결문 논란이 일어난 이후 법원행정처는 “발달장애인, 언어장애인을 위한 알기 쉬운 자료와 보완 대체 의사소통 개발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장애인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보기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판결문으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