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용준 기자]수많은 굴곡을 지나온 한국 현대사의 중심축에는 광화문광장, 그리고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광장은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6·29 선언을 이끌어내면서 민주화의 물꼬를 텄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에 분노해 모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 보낼때도 광장은 묵묵히 자리를 내줬습니다.
때로는 '명박산성'이라는 이름으로 경찰 전경차량에 둘러싸여 정권으로부터 소통의 단절을 강요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광장은 '열린 공간'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국정농단'의 빌미를 자초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냈고, 촛불은 밤늦게까지 광장을 밝혔습니다.
광장은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늘 시민들이 자리를 메웠습니다. 광장은 시민들과 만나면서 한국 현대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디딤돌도 묵묵히 제공할 겁니다.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광화문에서 엄수되고 있다.(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화)
87년 6월 항쟁의 백미
1987년 7월9일 광화문광장에서 이뤄진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당시 사진입니다. 1987년 6월은 어느 때보다 민주화의 열기로 뜨거웠던 시기입니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도화선이 돼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7월9일 이뤄진 이한열 열사 장례식은 6월항쟁의 대미였습니다. 연세대에서 출발한 행렬은 서울광장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100만명을 훌쩍 넘겼습니다.
2004년 3월13일 시민들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무효를 요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현 촛불집회의 원형
2004년 3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탄핵당할 위기에 놓이자 다시 시민들은 광화문으로 모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른바 ‘촛불집회’의 모습이 이때 갖춰졌습니다. 당시 촛불집회는 문화제 형식으로 열리면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폭력시위와 선을 그었습니다.
수십만명이 광화문에 나와 촛불을 들면서 불 붙은 민심은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4월 치뤄진 총선에서 탄핵 역풍이 불면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5월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청구를 기각 결정했습니다.
2008년 6월11일 광화문 네거리에 설치된 컨테이너 장애물을 철거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단절된 광장, 명박산성
2008년은 광우병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당시 광화문광장에서 이뤄진 광우병 시위가 진행돼 갈수록 인원이 늘었습니다. 시위대의 발길이 청와대로 향하자 정부에서는 기상천외한 답을 내놨습니다.
광우병 시위가 정점에 이른 6월10일, 경찰은 세종대로 한복판에 컨테이너 바리케이드 구조물을 설치했습니다. 시위대의 진입을 봉쇄하려는 의도로 설치된 일명 ‘명박산성’은 광장을 단절시키며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단 하루만에 철거됐습니다.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시민.(사진=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던 날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수많은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했습니다.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뤄지며 도합 500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다녀갔습니다.
영결식이 엄수된 광화문 일대에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슬퍼하는 인파로 가득했으며, 그를 상징하는 노란 모자와 노란 풍선 등으로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2017년 1월 열린 촛불집회에 몰린 인파.(사진=연합뉴스)
촛불로 뜨거웠던 2016년 겨울 광화문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호헌철폐 독재타도’가 있었다면 2016년 촛불집회엔 ‘이게 나라냐’가 있었습니다. 일명 박근혜·촤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나라가 뒤집혔고, 2016년 10월 29일부터 총 23주에 걸쳐 누적 1656만명이 촛불집회에 참여했습니다.
2016년 12월3일엔 경찰 추산 43만명, 주최측 추산 232만명으로 정부 수립 이래 최대규모를 기록했습니다. 12월9일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으며, 다음해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인용을 결정했습니다.
지난달 23일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독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재구조화 거쳐 시민의 광장으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은 박원순 전 시장이 시작해 오세훈 시장이 완성했습니다. 재구조화의 핵심은 광장 서측에 있던 차선을 시민공간으로 만들어 세종문화회관부터 이순신 동상까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내용입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로 행정의 중심지였던 광화문은 이후 군부독재 시절 복원됐으나 고증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전히 견뎌낸 광화문광장은 이제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모습은 바뀐다 해도, 늘 그랬듯이 광화문 광장은 한국이 위기때마다 자리를 내 줄겁니다. 아무 조건없이 자식을 바라보며 보듬는 어머니 처럼요.
박용준 기자 yjunsa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