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하지 말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실행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라는 증표가 ‘반성문’일겁니다.
요즘은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학창시절 반 친구 몇 명이 사고친 것에 대해 반 전체가 반성문을 작성해 제출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살아가는 동안 반성문 한번 안 써본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드물겁니다.
이런 반성문이 요즘에도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는 곳이 법원일겁니다.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의자가 재판부에 선처를 구할 때 냅니다. 효과가 없을 것 같지만, 있답니다.
반성문, 성범죄 양형기준 적용비율 71%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2019년 1심 사건 중 양형 기준 적용 사건 수'에 따르면 양형기준에 '진지한 반성'이 적용된 사건은 전체 범죄군 가운데 39.9%를 차지했습니다. 성범죄는 '진지한 반성'의 양형기준 적용비율이 70.9%에 이르렀습니다.
즉, 반성문을 잘 내면 피의자 10명 가운데 4명, 성범죄자는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법원 판결시 죗값이 깎인다는 겁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3월 ‘진지한 반성’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회복 또는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을 조사·판단한 결과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입니다.
법원, 반성문 필요성 고민해야
‘법이 없어야 살 사람들’이 반성문을 낸다고 얼마나 진심으로 뉘우칠 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반성문은 많게는 수십개씩 제출하는 것이 ‘범죄자들의 관례’로 굳어진 것이 현실입니다.
중학생 딸의 친구를 유인해 추행에 이어 살해까지 저지른 뒤 사체를 유기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2018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습니다.
이영학은 1심 선고전 14번, 2심 선고까지 26번, 대법원 확정 판결을 앞두고 3번 등 모두 43차례 반성문을 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사방' 사건 조주빈도 재판 과정에서 100번이 넘는 반성문을 써냈습니다. 집단 성폭행 등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정준영도 재판 과정에서 반성문을 4번 제출했습니다.
인터넷 포털에 ‘반성문’을 치면 반성문 대필을 해주겠다는 업체가 줄을 잇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 반성문의 취지일텐데, 반성도 돈을 주고 사면 형량이 줄어드는 세상입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반성문이 공개돼 논란입니다. 2심에서 성폭행 정황이 인정돼 1심 12년보다 많은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항소심에 앞서 가해자가 법원에 낸 것을 피해자가 입수해 지금에야 공개했다고 하니, ‘진지한 반성’이 없어 2심 감형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반성없는 반성문’이 이처럼 법원에 재판 도중 제출된다는 점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부분 가해자나 범죄자들이 제출하는 반성문의 첫 줄은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합니다. 피해자에 대한 반성이 아닌 재판장님에게만 반성하는 이같은 의미없는 반성문. 이제 우리 법원도 반성문이 형량에 미치는 시대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오승주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