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은 19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진보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경제 성적도 월등 좋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안보는 보수정부가 잘한다', '경제는 보수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고 밝혔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에서 열리는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이제는 문민정부 이후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정부의 안보 성적과 경제 성적을 비교해볼 수 있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파탄 난 지금의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착잡하기 짝이 없다"며 "평양공동선언에서 더 진도를 내지 못했던 것, 실천적인 성과로 불가역적인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또 "지나치게 진영외교에 치우쳐 외교의 균형을 잃게 되면 안보와 경제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며 "동맹을 최대한 중시하면서도 균형 있는 외교를 펼쳐나가는 섬세한 외교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문 전 대통령은 5년 전 평양공동선언을 계기로 자신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맺은 9·19 남북군사합의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최후의 안전핀을 제거하는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다음은 문 전 대통령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 인사말 전문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퇴임 후 서울에 온 것이 처음입니다. 공식적인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그 첫 행사가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인 것이 매우 뜻깊습니다. 뜻깊은 행사를 함께 준비해주신 기념행사준비위원회와 김대중재단, 노무현재단, 광주광역시와 경기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제주특별자치도, 포럼 사의재와 한반도평화포럼, 그리고 후원해주신 에버트 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편으로, 언제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탄 난 지금의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착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평양공동선언에서 더 진도를 내지 못했던 것, 실천적인 성과로 불가역적인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2008년 10월에 열린 10·4 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 때 노무현 대통령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10·4 공동선언이라는 소중한 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사람들이 물을 주지 않아 나무가 시들고 있다고 탄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2018년 4월27일 남북이 판문점에서 다시 마주 앉았을 때, 그리고 9월19일 평양에서 만남이 이어졌을 때 11년의 공백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그냥 당연하게 10·4 공동선언을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더 발전된 합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10·4 선언은 결코 시든 것이 아니었고,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으로 다시 피어났습니다.
되돌아보면, 10·4 선언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정부의 7·4 공동성명에서 시작해 노태우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정부의 6·15 공동선언, 노무현정부의 10·4 공동선언, 문재인정부의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까지 역대 정부는 긴 공백기간을 뛰어넘으며 이어달리기를 해왔습니다. 이어달리기가 될 때마다 남북관계는 발전하고 평화가 진전되었습니다. 남북 단일팀이 이뤄지고, 북한의 선수단과 응원단이 남한으로 왔으며,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우리 국민 200만명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구시대적이고 대결적인 냉전 이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때 이어달리기는 장시간 중단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남북관계는 파탄나고 평화 대신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목함지뢰 사건이 발생했고, 아까운 장병들과 국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와 다르게, 과거 서독은 정권이 바뀌어도 이념과 상관없이 동방정책과 동독포용정책이 중단 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동구권의 붕괴가 시작되었을 때, 동독 국민들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서독의 우월한 체제를 선택했고, 자발적인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어달리기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면, 남북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남북은 공존하며 평화를 키웠을 것이고, 언젠가 평화적인 통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평양공동선언 역시 훗날 냉전적 이념보다 평화를 중시하는 정부가 이어달리기를 할 때 더 진전된 남북합의로 꽃피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어달리기의 공백기간이 짧을수록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는 낮아질 것이고, 남북은 그만큼 더 평화에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평화가 경제’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대북포용정책과 평화번영적책을 설명할 때마다 ‘평화가 경제’라는 말을 해왔는데, 평화를 통해 경제를 더 번영시키겠다는 미래의 목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경제’라는 것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현실입니다. 문민정부가 시작된 김영삼 정부부터 지금의 윤석열 정부까지 역대 정부를 거시적으로 비교해보면, 이어달리기로 남북관계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시기의 경제성적이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항상 좋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경제의 규모, 즉 GDP가 세계 10위권 안으로 진입한 시기는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 뿐입니다. 지난해 우리 경제규모는 세계 13위를 기록해 10위권에서 밀려났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을 보아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기간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문재인 정부는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열었습니다. 반면에 이어달리기가 중단되었던 정부 기간에는 국민소득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줄어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에 1인당 국민소득은 3만5000불을 넘었는데, 지난해 3만2000불 대로 국민소득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를 환율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환율이 높아졌다는 것 자체가 우리 경제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나빠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어달리기가 중단되면 환율이 높아지곤 했습니다.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국가부도위험지수, 즉 CDS 프리미엄지수입니다. 그 지수가 가장 낮았던 시기도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였습니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 우리 경제의 신인도가 가장 높았다는 뜻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CDS 프리미엄지수가 가장 낮게 떨어져 국채발행 금리가 마이너스였던 사례까지 있었습니다. 지난해 CDS 프리미엄지수가 다시 큰 폭으로 올라갔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그 밖에도 수출 증가, 무역수지 흑자 규모, 외환보유고, 물가, 주가지수, 외국인 투자액 등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지금보다 좋았습니다. 국가부채를 많이 늘리는 적자재정의 효과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 이전 2년 동안 사상 최대의 재정흑자를 기록한 바 있고, 적자재정은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기간 동안 국민 안전과 민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기간 동안에도 OECD 국가 중 국가부채율 증가가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해 ‘위기에 강한 대한민국’의 면모를 과시한 바 있습니다. 오히려 재정적자는 현 정부에서 더욱 커졌는데, 적자 원인도 경기부진으로 인한 세수감소와 부자감세 때문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으로 중국, 소련,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본격적인 개방통상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전세계에서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평화로운 가운데 주변 국가들과 균형 있는 외교를 펼칠 때 코리아 리스크가 줄어들고 수출경제도 활기를 띄기 마련입니다. 지나치게 진영외교에 치우쳐 외교의 균형을 잃게 되면, 안보와 경제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동맹을 최대한 중시하면서도 균형 있는 외교를 펼쳐나가는 섬세한 외교전략이 필요합니다. ‘평화가 경제’인만큼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9.19 평양공동선언의 이어달리기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남북 간에 대화를 하지 못할 시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관계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북한의 계속된 도발에 더해 최근의 외교 행보까지 한반도의 위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대화를 말할 분위기가 아닌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엄중했습니다. 북한의 거듭된 핵 실험, 단거리에서 장거리까지 일본 열도를 넘어 미국 본토 거리까지 사거리를 늘려가는 연이은 미사일 도발, 그에 대응하여 점점 강력해진 유엔안보리 제재와 최대압박을 위한 빈틈 없는 한미 공조, 북미 간의 험악한 말폭탄 등으로 인해 한반도의 위기가 갈수록 고조되었습니다. 외신들은 연일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가득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군사적 옵션과 전쟁 시나리오를 검토한다는 정보들이 있었는데, 그 후 미측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실제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위기의 끝에 반드시 대화의 기회가 올 것이고, 위기가 깊어질수록 대화의 기회가 다가온다고 믿으며 대화를 준비했습니다. 남북관계의 위기가 충돌로 치닫는 것을 막는 길은 대화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엔안보리 제재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비핵화 로드맵과 함께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과의 대화 역시 미국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재인정부는 2017년 6월에 열린 첫 번째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달성한다는 원칙과 함께 북한에 대한 제재가 외교의 수단이며, 미국이 한국 정부의 대화 노력과 주도적 역할을 지지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진정성 있는 대화 노력을 펼친 끝에 마침내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를 견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의 위기를 풀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성 있는 대화 노력으로 위기가 충돌로 치닫는 것을 막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9·19 평양공동선언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부속합의서로 체결된 남북군사합의였습니다. NLL을 포함한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고, 육상, 해상, 공중으로 일정한 구역의 군사운용을 통제함으로써 접경지역에서의 우발적인 군사 충돌 가능성을 방지할 목적으로 남북 간에 사상 최초로 체결된 구체적인 군비통제 합의였습니다.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9·19 평양공동선언이 흔들리면서 군사합의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정부·여당에서 군사합의를 폐기해야 한다거나 폐기를 검토한다는 등의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군사합의는 지금까지 남북간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문재인 정부 동안 남북 간에 단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역대 정부 중 단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정부는 노무현정부와 문재인정부 뿐입니다.
남북관계가 다시 파탄을 맞고 있는 지금도 남북군사합의는 남북 간의 군사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군사합의를 폐기한다는 것은 최후의 안전핀을 제거하는 무책임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남북한 모두, 관계가 악화되고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군사합의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준수하여 최악의 상황을 막으면서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비핵화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 간에도 군사합의를 더욱 발전시켜 재래식 군비까지 축소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9·19 평양공동선언의 교훈을 말하면서 역대 정부의 안보와 경제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문민정부 이후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정부의 안보 성적과 경제 성적을 비교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진보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경제 성적도 월등 좋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보는 보수정부가 잘한다’, ‘경제는 보수정부가 낫다’ 이런 조작된 신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