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대원들이 오늘날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결성했다. (사진=국방부 블로그 화면 캡처)
국군의 역사적 뿌리 주제를 독자들이 계속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 박승환 대한제국군 참령 흉상을 교정에서 철거하거나 이전하려는 계획 때문이죠. 육사와 육군 지휘부는 독립전쟁이 아니라, 미 군정 시기 조선경비대와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조직의 기원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방혜린씨라는 여성 예비역 해군 대위가 얼마 전 일간신문에 "육사의 부끄러운 뿌리 찾기"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습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근무했습니다. 전역 뒤 군인권센터 활동가로 한동안 일했네요.
그는 해사에서 손원일 제독을 중심으로 해군 창설 과정을 자세히 교육하고 기념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손원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입니다. 본인도 독립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해사는 학업과 품행이 우수한 생도에게 손원일상을 수여합니다. 해군은 잠수함에 손원일, 안중근, 김좌진, 이범석, 유관순, 홍범도 이름을 붙였습니다. 해군이 항일 독립전쟁을 계승한다는 의지를 담은 거죠.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오랜 세월 요직을 차지했던 육군과 비교해, 해군은 다르다고 방씨는 주장하는데요. 뭐가 얼마나 다를까 궁금해 역사를 살펴봤습니다.
손원일은 조국이 해방되면 해군을 건설하리라 일찍이 마음먹었습니다. 이를 위해 중국 해군에 입대하려고 했는데 외국인이라고 받아주지 않았죠. 대신 상하이 중앙대학 항해과에서 공부하고 독일 상선에 취업해 함부르크~ 수에즈 운하~요코하마~블라디보스토크 국제노선을 뛰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하자 손원일은 중국을 떠나 귀환합니다. 남한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저마다 군사단체를 만들었고 숫자가 적지만 중국군과 광복군 출신도 모이고 있었죠. 1945년 11월 미 군정청에 등록한 군사단체만 30여 개가 난립했습니다.
손원일은 연희전문학교 교장 유억겸을 찾아가 상의합니다. "해군 창설에 한 몸 바치려고 한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 국내에 아는 이가 없고 군대 생활 경험도 없다." 손원일은 8월21일 직접 풀통을 들고 서울 거리로 나가 대원 모집 벽보를 붙입니다. 같은 날 근처에서 똑같은 내용으로 다른 벽보를 붙이던 정긍모를 만나 의기투합합니다. 벽보를 보고 모여든 대원들을 중심으로 해사대 간판을 걸었죠. 1945년 11월11일 해방병단으로 발전시켰고, 여기에 미 군정이 해안경비대 지위를 공식 부여합니다. 대한민국 해군으로 가는 과정이죠.
정긍모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졸업하고 한국 여수~일본 하카타 노선 여객선 기관사로 근무했습니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나와 일본 상선 기관사로 일한 한갑수도 참여했습니다.
해군 창설에는 손원일이나 정긍모처럼 서양이나 중국, 일본 상선에 근무했던 항해사, 기관사, 통신사 등 해운 전문인력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일본군 경력자는 있을 수 없었죠. 만주군 출신이 좀 있었는데 1949년 해병대를 만들 때 지상군 경력자라고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육군, 공군과 달리 해군은 역대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1명도 없게 됐죠. 이런 대목을 두고 해군 장교들은 "클린 해군"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손원일과 창설 초기 주역들은 해군 문화에서도 근대적 기풍을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손원일은 외국 상선 사관과 해군 선진국 영국 문화를 보고 '해군은 신사(gentleman)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명예와 신의, 약자 보호를 실천하는 '신사 해군'을 강조했습니다. 신사는 곧 선비죠. 선비 사(士) 한자를 열 십(十)과 한 일(一)로 나누면 숫자 11이 나옵니다. 이런 계산으로 11월11일을 해방병단 창설일로 택했습니다.
손원일 제독. (사진=국방부 블로그 화면 캡처)
초대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은 장병 실천지침 6개 항 가운데 '군인은 정치담(談)을 (하지) 말고 도별담(道別談)을 폐지하자'를 넣었습니다. 정치 관여와 출신 지역별 파벌 조성을 막으려고 했죠. 해군 인사기록 카드에는 원적과 본적을 빼도록 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 손원일은 해병대 간부 공정식에게 3가지 지침을 내립니다. 첫째, 장병을 구타하지 말라.(구타는 일본군 잔재다) 둘째, 포로와 부역자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 셋째, 명령 불복종, 도망 장병 등 위법자는 즉결처분하지 말고 가능한 한 군법에 회부해 처리하라.
한국군은 독립군과 광복군 등 빛나는 독립전쟁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독립전쟁 정통성을 충분히 교육하고 기념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군에서는 억압과 부패라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문화 잔재도 한동안 문제였습니다. 억압과 부패가 만연하면 강한 군대가 되기 어렵죠.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들이 국방 요직을 차지하던 시절에, 이런 폐해가 심했습니다.
오늘날 해군본부는 홈페이지에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와 손원일 이야기를 기록하고 정신 계승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방혜린씨가 신문 기고에서 해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죠. 역사에 살펴볼 대목이 있네요.
■필자 소개/박창식/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말하기와 글쓰기, 언론 홍보와 위기관리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