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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86-1의 억울한 용기
입력 : 2023-11-24 오후 6:00:23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익숙한 소리 뒤에 진기한 광경이 펼쳐지는 곳이 1호선 열차입니다. 지난 21일 밤 10시. 신창행 열차 문이 열리자, 한 젊은 승객이 노약자석에 가방을 놓고 스마트폰을 만집니다. 그리고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누구도 원치 않은 막춤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21일 10시 28분 신창행 311286-1 객차에서 한 여성이 춤 추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졸지에 관객이 된 승객들은 노래 없는 춤 공연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공연자는 무선 이어폰으로 노래 들으며 팔 다리를 흔들어댔으니까요. 문제는 열차 문이 열릴 때마다 토끼눈을 뜬 승객들이 괴기 서커스의 한복판을 지나가야 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코레일에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신창행 311286-1에서 미친 여자가 춤을 계속 춥니다.
"사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지속적으로 소란 행위를 하시는 분인지 확인이 되면 철도경찰에 요청하겠습니다."
 
코레일의 답장에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화살같은 시선이 제 얼굴에 꽂혔습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 저에 대한 비난과 도덕적 우위를 담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거죠. 금방이라도 저의 촬영에 대해 문제 제기해 나름의 정의 실현에 나서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지금까지 자신이 노려봐서 꼬리 안 내린 녀석은 없었다는 태도였어요.
 
저는 계속 춤 추는 여자 사진과 영상을 코레일에 전송했습니다. 그리고 맞은편 남자는 의분의 화살을 멈추지 않고 쏘아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남자의 눈을 마주보고 전화기 화면을 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레일에 사진 보내는 겁니다."
 
21일 코레일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사진=문자메시지 캡처)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절 비웃는 표정으로 옆에 앉은 애인에게 속삭였는데요.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에 대신 나선 용기에는 섣부른 비난이 따라붙는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코레일의 문자메시지용 번호로는 사진 전송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결국 코레일 전화 상담 번호를 눌러, 이 미친 짓을 끝내기 위한 통화를 시작했습니다.
 
맞은편 남자는 여성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제 통화를 들으며 다시 절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실체 없는 도덕적 우위를 재확인한 남자는 애인과 함께 그 여자 옆을 지나 문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몇 정거장 뒤, 드디어 코레일 직원이 객실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1호선 춤꾼에게 "계속 춤 추시면 밖으로 나가셔야 한다"고 경고했고, 이 여성은 계속 앉아서 목적지로 가기를 택했습니다. 제가 들은 그녀의 목적지는 종점에 가까웠는데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면 누군가 다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화를 참지 못한 누군가가 그녀에게 욕설은 물론 폭력도 휘두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멋대로 판단한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본인은 나서지 않은 채 용기 낸 누군가를 문제 삼으려던 그 눈과 표정이 씁쓸하게 남아있습니다.
 
저는 최근 '마블 스파이더맨' 게임 시리즈를 즐기고 있는데요. 스파이더맨의 활약을 엉뚱하게 왜곡하는 언론인 존 조나 제임슨의 우스꽝스런 라디오 방송을 떠올리며 이 불쾌한 감정 소모를 끝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다고 그 남자에 대한 미움이 쉽게 사그라들진 않겠지만요.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한 달 전이잖아요. 게임 업계 관계자로부터 기획 기사에 대한 귀중한 조언도 들었으니, 작은 불행 뒤에 큰 선물 받았다고 여기렵니다. 엔씨소프트 1층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 보시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한 달 전 이브 보내시기 바랍니다.
 
24일 판교 엔씨소프트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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