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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 기획 연재 37회)김종직: <조의제문(弔義帝文)>지어 세조 비판…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 삽입시키려다 발각돼 무오사화 발생
입력 : 2024-01-15 오전 6:00:00
본격적으로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철학사상에 대해서 얘기하기에 앞서서 먼저 다루어야 할 인물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 선생입니다. 
 
그는 우리 역사상 첫 필화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조의제문[弔義帝文,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글’이라는 뜻]>이라는 글을 쓴 주인공입니다. 이 글로 인해서 조선시대 이른바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연산군 4년(서기 1498년)에 발생했으며, 이 사화로 인해 김일손 등 모두 11명의 선비가 처형당하고 김굉필 등 6명의 선비가 귀양에 보내졌습니다.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이미 작고한 뒤였음에도,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관이 쪼개지며 주검의 목이 잘리는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라고 불리는 봉건 권력자의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봉변을 당했습니다.
 
조선의 사림 시대를 연 문인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표지.사진=필자 제공
 
김종직은, <조의제문>이라는 글을 써서 세조의 단종 살해를 풍자했습니다. 그는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조의제문>의 들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정축(丁丑, 서기 1457년, 세조 3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을 출발해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묵었는데, 꿈에 예복을 제대로 차려 입은 헌칠한 모양의 귀신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王, 항우)에게 살해 되어 빈강(?江)에 잠겼습니다.“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나타나다니, 이것이 무슨 조짐일까요? 또 역사를 뒤져 살펴보아도 (의제가)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의제를) 쳐죽이고 그 주검을 물에 던진 것일까요? 이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드디어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합니다.“
 
조선의 사림 시대를 연 문인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속지 내용.사진=필자 제공
 
의제(義帝)는, 진나라의 학정에 맞서 옛 초나라 땅에서 거병한 항우가 초나라의 왕 자리를 찬탈한 뒤, 왕실의 적손인 웅심(熊心)을 ‘의제(義帝)’라 부르며, 초나라의 제왕의 자리에 앉혀놓은 뒤, 항우의 명령을 받은 하수인 영포(英布) 등을 시켜 항우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역사적 인물입니다. 항우가 영포를 시켜 의제를 살해했지만, 그의 주검을 물에 던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세조는 ‘사육신 사건’ 이후에 이 사건에 단종도 원인을 제공한 잘못이 있다며, 그를 평민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노산군(魯山君)’으로 호칭을 낮춘 뒤, 영월 청룡포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 유배지는 동강이 3면을 둘러싸고 흐르고 있어서, 육지에 놓여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세조는 단종을 유배를 보내 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아예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약을 보냈습니다. 세조 3년(서기 1457년) 10월 21일,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들은 당시 열일곱 살이던 단종이 자결하라는 금부도사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자, 그를 활줄로 목 졸라 살해한 뒤 그의 주검을 유배지를 싸감고 흐르던 동강 영월 청령포에 던져 버렸습니다. 청령포에 버려진 단종의 주검은 당시 영월 호장(戶長, 말단 지방관리)이던 엄홍도가 아들들과 함께 건져 내어서 몰래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엄홍도의 이의로운 행적은 영조와 정조 때 알려져서,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게 되었습니다. 엄홍도는 단종을 장사 치러준 뒤, 가족들과 함께 세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문경에 은둔하여 살았습니다.)
 
김종직의 초상.사진=필자 제공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의제 살해 사건과 단종 살해 사건 등 두 사건을 결합하여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꿈속에 나타났다는 의제(義帝)는, “서초 패왕(西楚?王, 항우)에게 살해 되어 빈강(?江)에 잠겼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의제는 살해된 뒤 그 주검이 강물의 버려졌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강물에 잠긴 것은 의제의 주검이 아니라 단종의 주검이었습니다.
 
김종직이 의제의 꿈을 꾸었다고 밝히고 있는 날짜인, “‘정축(丁丑, 서기 1457년, 세조 3년) 10월 어느 날”은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들에게 단종이 살해당하던 날짜와 같은 해 같은 달입니다.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동강이 3면을 둘러싸고 흐르고 있어서, 육지에 놓여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은 곳이었다.사진=필자 제공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매우 사회에 대한 풍자 정신과 비판 정신 담겨있는 독특하고 탁월한 문학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의제문>은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집(?畢齋集)》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조의제문>이 계기가 돼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년, 서기 1498년) 때 김종직 본인의 무덤이 훼손당하고 부관참시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집인 《점필재집》조차 전량 수거되어 불살라졌고, 판각은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점필재집》의 소각과 훼판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나타난 개인 문집 최초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지식층에 매우 큰 충격을 던져 주어 문인들의 저작 활동이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문집의 편찬과 간행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되거나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기휘문자(忌諱文字)를 되도록이면 문집에 수록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조의제문>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서 <조의제문>에 대해서 연산군이 신하들과 함께 논의했던 대목에 인용되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김종직의 제자이던 김일손은 실록청(實錄廳)에서 실록 편찬의 실무를 맡아보는 사관(史官)이었는데,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올 편찬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 속에 삽입시키려고 했습니다. 《성종실록》 초고가 다 엮어지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던 훈구파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며, 이를 문제 삼아 이 사안을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였습니다. 이극돈은 자신이 세조(수양대군)의 부인인 정희왕후가 죽었을 때, 나라가 상중임에도 술을 마시고 기생을 출입 시킨 것을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을 못마땅히 여기다가,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역공에 나선 것입니다. 사림파 선비들을 극혐 하던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주검의 목을 베도록 했습니다.
 
왜 김일손은 김종직의 이 위험한 글을 《성종실록》에 넣으려고 했을까요? 김일손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의 심경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종이 죽임을 당한 날[세조 3년(서기 1457년) 10월 21일] 《세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이 (…) 또한 스스로 목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 단종의 죽음과 그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아는 오늘 날 역사적 상식을 가지고 볼 때, 이 기록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실록청에서 일하는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이런 기록에 다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라는 직책을 맡은 선비로서, 이런 거짓된 기록만이 남는다는 것에 대해서, 김일손은 크게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손은 자신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넣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들과 글 쓰는 사람의 본래 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기자들과 글 쓰는 사람들, 지식인들이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과 정권을 쥔 정객들의 행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역사의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叔滋)와 어머니 밀양(密陽) 박(朴)씨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453년(단종 1년) 진사에 합격하여, 이해에 창녕(昌寧) 조(曺)씨 울진현령(蔚珍縣令) 계문(繼門)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1455년(세조 1년)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고, 145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박사를 거쳐 1463년 사헌부 감찰로서 세조의 불사(佛事)를 반대하는 간을 하다가 파직되었습니다.
 
1465년 영남병마평사로 기용되어 홍문관수찬·이조좌랑·예문관응교·수찬을 지냈습니다. 1471년(성종2년)에 함양군수를 역임하였고, 1476년 선산부사·홍문관응교·승문원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 등을 거쳐 1487년에 다시 외직으로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병조참판·공조참판·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도학을 이어받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영수로 추대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조위(曺偉)·남효온(南孝溫)·조신(曺伸)·표연말(表沿沫)·홍유손(洪裕孫) 등이 수학하였습니다. 영남 중소 지주 출신으로서 입신한 그는 사림의 종장(宗匠)으로서 추종하던 문하 그룹과 함께 훈구 세력들의 비리와 부도덕을 공격하여 치열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세조 때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으나.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하였으며, 세조의 찬위에 동조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는 세조의 부도덕함을 질책하고, 세조대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훈구 세력을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성종에게는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김종직은 성종과 대화할 때 “성삼문은 충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종이 깜짝 놀라자, 김종직은 “제가 임금님의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얘기해서, 성종의 얼굴이 풀렸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김종직은 성종에게 신분과 집안 배경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할 것과 단종조에 절개를 지킨 인사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 등용을 건의하였다. 성종은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는 듯한 그의 발언에 대해서는 반감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널리 인재를 구하는 한편 사림파와 청담파 계열 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등용 정책을 추진합니다. 김종직의 건의로 사림파 선비들의 현실 정치 참여의 물꼬가 트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종직을 사림의 영수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종에게 면학 분위기를 장려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문풍 진작과 학문 권면을 성종에게 건의하고, 면학 분위기와 문풍 진작을 위해서는 임금인 성종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성종에게 경연에 자주 참여하여 학문을 강론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성종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매일 경연에 출입하여 학문을 강독하였습니다. 이는 성리학에 입각한 군주의 통치를 강조하는 유교 국가로 진입하는 문턱을 넘어서도록 김종직이 초석을 깔았다고 평가 받는 까닭입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 서당과 서원, 향교 등을 세워 학문을 적극 장려, 권장하여 전국적으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김종직론>을 써서 김종직을 비판한 허균의 초상.사진=필자 제공
 
허균은 <김종직론>에서, “김종직이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판한 조의제문을 쓴 것이 가소로운 일”이라며, “마음은 교활하여 넉넉히 할 수 있는 일도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단종을 배신하고 고위직에 오른 자신의 졸렬함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약삭빠르고 교묘하다”(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藁)》 <김종직론>)고 거의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세조의 권력 찬탈을 비판하면서도 세조의 후손들의 왕조(예종, 성종)에서 고위직을 누렸으니, 이중적인 것이 아니냐는 게 허균의 비판인 것입니다. 허균은 “세상 사람들이 김종직의 행적은 살펴보지 않고,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사림파의 영수라고 치켜 올려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특별히 김종직에 대해 기록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허균의 김종지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고 참조할 만한 것이지만, 허균의 시각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공정을 기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김종직의 속뜻 우리가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는 세조의 권력 찬탈에 대해서는 사림의 기본적 원칙적인 시각에서 비판 했지만, 왕조의 벼슬길에 나아가서, 사림을 중앙 정치로 이끌어야 된다는 소신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신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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