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30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제2테크노밸리기업지원허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일곱번째, 상생의 디지털, 국민권익 보호'에서 고진 대통령직속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장의 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오로지 바라는 것은 진상규명뿐"이라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 유가족들의 절규와 호소에도 끝내 이를 외면한 겁니다. 45명의 유가족과 종교인이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역 인근에서 대통령실까지 북소리에 맞춰 오체투지를 이어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국민 과반 반대에도…지체 없이 '거부권'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이태원 참사 특별법' 재의요구안(거부안)을 재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해당 법안은 다시 국회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앞서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주도로 통과된 관련 특별법은 2022년 10월29일 159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구성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특조위원은 국회의장이 유가족 등 관련 단체와 협의해 3명을 추천하고 여야가 4명씩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습니다. 특조위는 불송치됐거나 수사가 중지된 사건 기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총리는 "특조위는 동행명령, 압수수색 의뢰와 같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11명의 위원을 임명하는 절차에서도 공정성과 중립성이 훼손될 우려가 상당하다"고 특조위원의 권한과 구성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또 "참사로 인한 아픔이 정쟁이나 위헌의 소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며 국민 뜻과는 정반대 결정을 했습니다.
실제 국민 여론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지난 16일 발표된 '‘뉴스토마토·미디어토마토' 여론조사 결과(13~14일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54.4%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17일 공개된 '스트레이트뉴스·조원씨앤아이' 여론조사 결과(13~15일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2%포인트)에서도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응답이 52.7%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국민 과반의 반대에도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이후 지체하지 않고 당일에 이를 재가했습니다. 잇단 거부권 행사를 통해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지속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특히 윤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1년 8개월 만에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포함해 총 9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됐습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최다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입니다.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이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농성 중 이태원 참사 특별법 재의요구안 의결 소식이 전해지자 허탈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가족 동의 없이 지원책 발표…끝까지 '일방통행'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후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국회로 다시 돌아가 재의결 절차를 밟게 되지만, 여당의 반대가 여전한 만큼 폐기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국회 재의결에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현재 국민의힘 의석수는 112석입니다.
정부는 이날 윤 대통령에게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며 '10·29참사 피해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유가족들과 국민 여론을 고려한 조치로 보입니다. 이번 정부 대책에는 △피해자 생활안정 지원금 및 의료비·간병비 확대 지원 △치유휴직 지원 △심리안정 프로그램 운영 △이태원 지역 경제활성화 방안 마련 △추모시설 건립 등이 담겼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지원 대책은 유가족들과 협의하지 않은 일방적 발표였습니다. 유가족들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마지막 호소마저 외면했다고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분향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는 유족들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 방법으로 묵살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여야 입장은 엇갈렸습니다. 민주당은 "유가족이 바란 것은 보상이 아니라 오직 진상규명이었다"며 "정부의 책임을 가리려는 윤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을 국민은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촉구했습니다. 반면 국민의힘은 "문제가 많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는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반민주적 입법폭주와 정치공작에 맞서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