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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금융)"투자자·출자자·스타트업 '한 배' 타는 실리콘밸리"
권리관계 동일한 계약구조 통용…"국내는 일일이 동의 받아야"
입력 : 2024-04-16 오전 6:00:01
[뉴스토마토 이보라 기자] 실리콘밸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 허브입니다. 애플과 구글, 메타, 엔비디아, AMD, 브로컴 등 세계적인 혁신기업들이 자리한 글로벌 테크산업의 중심지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창업활동이 일어나는 곳인데요. '쇼클리 반도체'를 설립한 윌리엄 쇼클리 스탠포드대 교수와 함께했던 이른바 '8인의 배신자'들이 페어차일드 반도체와 인텔 등을 세우면서 실리콘밸리의 모태가 됐습니다.
 
글로벌 스타트업 정보분석업체인 '스타트업 게놈'에 따르면 지난 2020년부터 스타트업 생태계 순위 중 부동의 1위는 실리콘밸리입니다. 민간 주도로 형성된 창업생태계인 실리콘밸리에서 미국 정부의 역할은 미미합니다. 2022년 기준 정부 주도 벤처투자액은 전체의 4.4%, 건수로는 0.9%에 불과합니다. 정책금융이 벤처스타트업 생태계의 70~80%를 차지하는 한국과는 다르죠. 미국 중소기업청(SBA)이 운영하는 스타트업 지원책은 '상업화' 이전의 초기단계 자금만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물론 미국 실리콘밸리를 우리나라 창업생태계와 곧바로 대조해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장 규모, 글로벌화 수준, 정책금융 역할 등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의 실리콘밸리가 있게 한 근간을 들여다보고 핵심 원리를 추출하고 변형해 적용하는 일은 가능하겠죠. 특히 계약구조 및 지분구조의 명확성과 투명성은 국내의 민간 투자생태계, 그리고 모태펀드를 비롯한 정책금융 섹터 모두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권리관계 동일한 계약서 토대로 '한 배'로 움직여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자와 투자자(VC), 임직원들은 서로 협력해 스타트업을 키워나갑니다. 바로 글로벌스탠다드로 통용되는 '계약구조' 덕분입니다. 대개 시리즈당 리딩투자자 1~2명이 계약을 주도하는데요. 리딩투자자의 주도 아래 해당 시리즈 투자가들은 동일한 권리를 명시한 하나의 계약서에 날인합니다. 투자자들이 권리관계가 같은 계약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밸류-업(value-up)' 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갈 수 있습니다. 
 
회사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는 이사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돼있어, 투자자 개별로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투자자와 기업 간 표준화된 계약서가 곧 스타트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클럽딜(공동투자)이 대부분이고, 투자자와 창업자 간 개별 계약을 진행하는 일이 많습니다. 단 하나의 의사결정에도 투자자에게 일일이 동의를 받아야합니다. 한두 곳의 투자자가 안건에 반대하면 다음 시리즈로 나갈 수 없거나 딜이 깨지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의 이장훈 중소벤처기업 영사는 "실리콘밸리는 실제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민간 투자생태계가 활발하다"면서 "동일 라운드에서 투자조건은 리드 투자자가 스타트업과 협의해 결정하고, 그외 투자자는 리드투자자가 확정한 투자조건 하에서 투자여부를 결정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대표는 "투자자별로 상이한 계약서가 각 투자사들 입장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투자자가 10곳 이상 넘어가면 마치 경영권이 분산돼 있는 것처럼 한 두 곳만 반대해도 일의 진행이 어려워지는 일이 많아 투자자들도 곤란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미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투자생태계에서는 투자자 수가 늘어나도 이른바 '거버넌스 리스크'가 낮다고 평가된다고 김 대표는 덧붙였습니다. 권리관계가 동일한 계약서가 바탕이 되는 까닭입니다.
 
리딩투자자가 사외이사로 참여…막강한 영향력 행사하기도
 
계약 과정에서 리딩 투자자 1명은 의결권을 가진 사외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해당 시리즈를 대표하는 투자자가 이사회에 추가되는 식입니다. 의결권을 가지지 못한 VC는 옵저버(관찰자)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동일한 사외이사와 창업자 등이 참여하는 이사회에서는 △신주발행 △M&A(인수 합병) △정관변경 등 회사의 크고 작은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지는데요. 이외에도 보상위원회나, 감사위원회 등 여러 위원회가 구성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곳도 많습니다. 
 
샘 알트만 Open AI CEO가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Open AI 본사에서 열린 ‘K-Statup & Open AI Matching Day in US' 행사에서 참여 스타트업 대표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사진=중소벤처기업부)
 
이렇게 투자자들도 참여하는 이사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심지어는 이사회가 CEO를 해임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는데요. 지난해 11월 오픈AI 이사회가 이 회사 창업자이자 '챗GPT의 아버지' 샘 알트만을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며 해임했다가 복귀시켰죠.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 역시 1985년 애플 이사회로부터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사회에 사외이사로 참여하는 투자자들은 사업 관점에서 본인의 네트워크를 스타트업에 소개하거나, 세일즈나 마케팅 영업, 임원 채용에 도움을 주는 등 일종의 '조언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경쟁 기업 간 소송이 생길 경우 투자자들 간 합의로 맞대결을 피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1년에 최소 4번가량 이사회 미팅을 통해 스타트업의 다양한 일에 대해 논의하고 머리를 맞댑니다. 출자자들은 투자자를 평가할 때 단순 수익률뿐 아니라 스타트업 성장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해 어떠한 도움을 줬는지 '정성적인 평가'도 병행합니다. 이 같은 평가 구조는 투자가가 수익률 제고뿐 아니라 스타트업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힘쓰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투자자 위주 지분구조...창업자 지분 신경 안쓰는 분위기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은 주로 투자자 위주의 지분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동일한 계약'에 의해 다양한 투자자들이 주주가 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창업주의 지분이 작아져도, 혹은 창업주가 추가로 투자하지 않아도 투자자들은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M&A가 활발한 탓에 창업주가 지분을 팔고 나가는 것에 대한 반감도 적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VC업계 관계자는 "나스닥에서는 창업자 지분이 낮은 것이 문제되지 않을 뿐더러 실리콘밸리에서는 창업자의 노력이 VC의 자금과 같은 가치로 인정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 자기 돈을 투자하지 않는 창업자도 상당히 많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한국 스타트업이 대부분 창업자 중심의 지분구조를 갖게 되는 것은 창업자의 지분을 중요시하는 국내 금융투자업계 분위기와 무관치 않습니다. 창업주의 지분이 낮으면 의사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VC에 끌려다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VC의 주요 자금 회수 통로로 M&A보다는 IPO(기업공개)가 이용되는데요. 그런데 이 주식시장 상장 과정에서 주관사(증권사)와 한국거래소 등이 창업자 지분이 낮은 것을 경계하고 우려하며 이를 보완할 만한 장치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국내 창업자들이 초기(시리즈 A·B)에서 후기(C·D)로 갈수록 지분이 덜 희석되는 대출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산나눔재단에 따르면 한국 투자생태계는 시리즈 A·B 등 초기 투자 비중은 높지만 후기로 갈수록 투자 생태계가 악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흐름은 한국 투자 생태계가 최근 양적으로 팽창했음에도 창업과 성장, 회수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확립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0년짜리 펀드…투자자 전문성과도 연결
 
실리콘밸리의 펀드 만기는 대개 10년입니다. 한국의 VC펀드는 통상 7~8년짜리가 많고, 미국은 보통 10년에 추가로 1~2년까지 연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기까지 여유가 있다 보니 기업 초기 단계부터 일찍 투자해 긴 호흡으로 기업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생깁니다. 대개 초기 5년에는 투자하고, 후기 5년은 관리를 하는 식이 많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국과 다르게 민간 주도로 자유로운 영역에서 10여 년간 투자가 가능해, 20~30년 넘게 특정 섹터에서 자기만의 전문성을 쌓은 투자자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B2B(사업자간 거래)나 B2C(고객향 거래)등 특화분야를 가지고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식입니다. 반면 한국은 모태펀드나 성장금융을 통해 정권의 성향과 주력 분야 및 트렌드 등에 따라 투자섹터가 정해지고, VC가 이에 맞춰 투자해야 하는 관계로 전문성을 갖추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실리콘밸리와 한국 투자생태계 모두를 경험해본 이들은 하나같이 국내 생태계 역시 '글로벌스탠다드'에 준하는 동일한 계약을 토대로 한 투자금융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이 운영하는 '파빌리온'의 사례가 모범사례로 거론됩니다. 
 
박희덕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국내의 뛰어난 스타트업을 글로벌 생태계와 연결하려면 투자자 간 계약구조를 글로벌스탠다드로 맞춰야 한다"면서 "금융은 글로벌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투자자들 간 이해관계가 동일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계약구조가 국내 VC업계 뿐 아니라 모태펀드 등 정책금융에 자리잡게 된다면 국내 벤처창업 생태계의 질적성장과 함께 양적 팽창까지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보라 기자 bora11@etomato.com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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