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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철 주제네바 북한대표부 참사관. (사진=연합뉴스)
주영철 주제네바 북한대표부 참사관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스위스 유엔 제네바사무소 군축회의에서 "한국과 북한이 동족이라는 개념은 북한 측의 인식에서는 이미 완전히 제거됐다"며 "더는 동족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직전 러시아 측 대표가 한·미·일 안보 공조가 위험을 초래한다고 발언한 데 대해 주제네바 한국대표부 김일훈 참사관이 "같은 한민족을 대상으로 한 핵 선제공격 위협을 포함해 전례 없이 고도화되는 북한의 핵 위협이…"라고 발언하자, 곧바로 동족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나선 겁니다.
국제 외교 현장에서 북한 외교관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남북관계를 "동족 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공화국의 민족역사에서 통일·화해·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사우스코리아'(South Korea) 대신 '알오케이'(ROK)
이 지시 이후 북한 외교관들은 남한을 '사우스코리아'(South Korea) 대신 '알오케이'(ROK·Republic of Korea)로 호칭합니다. 내부적으로도 통일전선부를 '노동당 중앙위 10국'으로 바꾸는 등 대남기구를 개편하고 국가(애국사) 가사에서 '삼천리'를 '이 세상'으로 바꾸는가 하면, 각종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직접적인 통일, 동족 표현은 물론이고 이를 연상케 하는 용어도 지우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북 관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김정은 총비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이봉기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동독의 통일정책과 비교하면서 "북한에는 동독과 마찬가지로 (국가)존립의 조건"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지난달 30일에 낸 '동독의 2국가 2민족론의 전개 과정과 배경' 보고서에서 동독과 북한의 '2민족-2국가론 ’제기 상황을 비교·분석했습니다. 독일은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을 겪지 않았고 핵 문제도 없었지만, 분단 관리와 관계 개선에서 한반도가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사례입니다.
동독 1949년 제정 헌법…1민족-1국가론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은 1949년 국가 수립 초기에는 통일정책과 분단과정을 방지하기 위한 '1민족-1국가론을 채택합니다. 그래서 제정 헌법1조는 "독일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민주공화국이다", "독일 국적은 단지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1968년에 헌법을 개정해 1조를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국가"라고 바꿉니다. 같은 독일 민족으로 동독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서독에는 자본주의국가(독일연방공화국)가 있다는, '1민족-2국가'론으로 변경한 겁니다.
서독은 1969년 10월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동독의 국가성을 부정한 '할슈타인 원칙'과 달리 "독일 영토 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외국은 아니"라는 '특수 관계'론을 내세웁니다. 현실적으로 동독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국가승인은 거부합니다.(서독은 이 특수관계론을 1990년 독일 통일 때까지 집권당 교체와 관계없이 유지합니다.)
'1민족-2국가'론 거쳐, 1974년 헌법 '통일·민족' 모두 '삭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관계가 심화하는 가운데 울브리히트를 밀어내고 집권한 에리히 호네커는 1971년 8차 당대회에서 "서독과 달리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독일국가, 사회주의 민족이 발전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2민족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1974년 10월 헌법을 개정, 1968년 헌법 1조의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을 "독일민주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으로 대체하면서 이전 헌법의 통일과 민족 단어도 모두 지워버립니다. 현재 북한이 두 국가론을 내세우면서 보여주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김정은 총비서는 왜 지금 이 시점에 이 문제를 제기했을까요? 이 연구위원은 우선 동독이 서독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미망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북한도 남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가 깨어났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남북한 국력 격차의 현실을 직시한 뒤 북한 체제 수성을 민족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인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동독의 '2국가-2민족론'이 서독의 이니셔티브(주도권)에 대응해 동독을 유지하기 위한 수세적인 정책이었던 것처럼 북한도 그렇다는 겁니다.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지난해 12월 평양 당중앙위원회 본부 청사에서 소집된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북한, '통일-남조선 해방' 국가 정체성으로 상정
그런데 동독과 북한의 '2국가-2민족'주장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독은 '1민족-1국가'에서 오랜 기간 점진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래서 1983년 동독 국가안전부 등이 비밀리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7%는 양 독일이 더 이상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답변했고, 약 10%만이 하나의 독일민족을 옹호하였으며 약 15%는 부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반면 북한의 ‘단일민족 부정-통일 폐기’는 최근 갑작스럽게 제기된 것입니다. 북한은 1948년 정권 수립 이후 줄곧 '통일-남조선 해방'을 국가 정체성 수준으로 상정해 왔습니다. 선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도 이와 깊게 연결돼 있습니다. 이런 북한 사회에서 통일 폐기가 '원만하게' 흡수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