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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나주 성폭행 사건과 몰염치한 언론
입력 : 2012-09-03 오후 4:49:42
[뉴스토마토 권순욱기자] 전남 나주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의 파장이 만만치 않다.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고, 이에 뒤질세라 모든 언론사는 성폭행 뉴스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두 세 개의 기사는 보통이다. 갑자기 성폭행이 만연한 사회가 된 듯 하다. 언제는 안그랬다는 듯이 말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약물치료, 화학적 거세를 언급했고, 경찰은 불심검문을 부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성폭행 피의자들에 대해 집행유예 선고가 많다는 언론보도에 판사들이 자성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온다.
 
여기에 사회 전반적인 성문화에 대한 시비도 벌어지고 있고, 근엄한 목소리와 문체의 이른바 '훈장질'이 난무하고 있다.
 
불편하다. 특히 대한민국 언론의 근엄한 훈장질은 더욱 불편하다. 선정적인 기사 경쟁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도 불편하다.
 
불과 얼마전 경남 통영에서도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행 당하고 살해까지 당한 초등학생 사건이 있었고, 조금 더 멀리는 김길태 사건도 있었다. 아니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성폭행 사건을 끄집어낼 수 있다. 기억이 안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나주 성폭행 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많으니 굳이 불필요하게 첨언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여기서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는 두 가지만 짚어보고자 한다.
 
두 가지 모두 필자가 밥 벌어먹고 살고 있는 언론에 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 사회의 성문화가 타락했다는 언론보도가 줄 잇고 있다. 성폭행 사건의 이면에는 잘못된 성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동 포르노 세계 톱5'라는 기사 제목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다. 술에서 성매수까지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풀싸롱' 기사도 연일 오르내리고, 우리 기업들이 룸싸롱에서 사용한 법인 카드 사용액수가 1조원에 육박한다는 보도도 예사롭지 않다.
 
분명히 문제가 있다. 대책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훈장질을 하고 있는 언론은 어떨까. 지금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보시기 바란다. 19금으로 분류해야 마땅한 광고들이 버젓히 활개를 치고 있다. 반면 케이블방송의 홈쇼핑은 성인용 광고는 심야에만 방송한다. 지상파 방송 역시 프로그램마다 연령 제한 표시를 하는 등 깐깐한 규제를 받고 있다. 하지만 언론사 홈페이지는 규제 무풍지대다.
 
언론사 홈페이지에 걸린 성인광고를 보면 대한민국이 무슨 섹스에 환장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착각할만 하다. 남녀 성기와 관련된 광고가 부지기수고, 화끈하고 뜨거운 밤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광고가 널렸다.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포르노 뺨칠 정도로 선정적이다.
 
이런 낯 뜨거운 광고를 연령 제한없이 볼 수 있는 곳이 언론사 홈페이지다.
 
어디 광고만 그런가. 걸그룹이니 뭐니 하는 소녀들의 몸을 훔쳐보는 기사와 사진은 얼마나 많은가.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섹시하기 위해 안달난 사회를 조장한게 과연 누군가. 대한민국 언론 아닌가.
 
최소한 한국 사회의 성문화가 어쩌고 훈장노릇을 할려면 내 눈의 들보를 먼저보고, 내 몸에 묻은 겨부터 털어내야 마땅하다.
 
또 하나의 심각한 사안이 있다.
 
몇 몇 언론사들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들을 만천하에 공개해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명분으로 몇 해 전부터 피의자 얼굴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흉악한 범죄가 어떤 범죄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니 경찰과 검찰도 흉악한 범죄를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전에 존재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냥 느낌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개념규정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선정적인 한국의 언론보도에서는 전 세계 문명국가의 거의 모든 헌법에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칙'은 그저 귀찮거나 사치스러운 장애물로 치부된다.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에 이르는 사법체계는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론재판을 이끌고 있는 '심판자 언론'이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한 분노를 등에 업고 그들이 혐오한다고 주장해 마지 않는 '포퓰리즘의 극치'를 달린다. 반대라도 좀 할라치면 여론의 매질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 얼굴 공개에 앞장섰던 한 신문이, 역설적으로 왜 피의자 얼굴을 함부로 공개하면 안되는지를 증명해줬다.
 
이 신문은 지난 1일자 1면 톱 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며 얼굴 사진을 크게 실었다. 하지만 그 사진의 주인공은 범인이 아니었다. 신문은 그 다음날 정정보도를 실었다. 그럼 끝난 일일까. 그 피해 당사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
  
문명국가를 자부하는 전 세계 국가들이 괜히 헌법에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한 게 아니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그 누군가가 범죄인으로 둔갑되고, 그로 인해 입게 되는 피해는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시민국가에서 '99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법언도 나온 것이다.
  
성폭행 피해를 입은 소녀를 생각하며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굴지의 신문이 범인이 아닌 사람을 극악한 범죄의 범인으로 단정해 대문짝만하게 사진을 실은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사회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나
.
건전한 상식을 가진 민주시민이라면,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권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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