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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인혁당 발언, 당시 대법관에 후폭풍
입력 : 2012-09-13 오후 1:39:16
[뉴스토마토 권순욱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인혁당' 발언 후폭풍이 거세다. 특히 인혁당 사건으로 숨진 사형수들과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대법원 판사들의 명단이 SNS를 통해 급속히 퍼지며 유신시대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지난 1974년 유신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이다. 유신을 반대하던 도예종 등 대구지역의 민주화 인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대법원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하며,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반인권적인 독재국가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인혁당 사건은 유신체제가 공포된 1972년 10월부터 이어진 일련의 공포정치의 연장선에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고, 그해 10월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거세지자 이듬해인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을 터트리면서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1974년 1월에는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실족사를 당했다.
 
1974년 7월 군사법원 재판을 통해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현 민주통합당의 유인태 의원과 이철 전 의원, 김지하 시인 등 7명과 그 배후인 인혁당 구성원으로 지목된 도예종 삼화토건 회장, 서도원 대구매일신문 기자, 여정남 경북대 학생회장 등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인혁당 사건 사형집행자 명단>
이름 나이 직업
서도원 53 전 대구매일신문기자
도예종 52 삼화토건 회장
송상진 48 양봉업
우홍선 46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하재완 44 건축업
김용원 41 경기여고 교사
이수병 40 일어학원 강사
여정남 32 경북대 학생회장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엇갈렸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7명은 교도소에 복역중 1975년 2월 대통령의 특별조치로 석방됐다. 사형선고라는 험한 일은 대법원 판사들이 하고, 은혜는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셈이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은 같은해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되었고, 18시간만인 4월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됐다.
 
특히 이 당시 대법원 판결을 선고한 8명의 대법원판사 명단이 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며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SNS에 퍼지고 있는 대법원 판사 명단>
성명 한자 직책 재임기간
민복기 閔復基 대법원장
1968.10~1973.3(5대 대법원장)
1973.3~1978.12(6대 대법원장)
민문기 閔文基 대법원 판사 1969.9∼1980.8
안병수 安秉洙 대법원 판사 1973.4∼1981.4
양병호 梁炳皓 대법원 판사 1969.9∼1980.8
한환진 韓桓鎭 대법원 판사 1973.4∼1981.2
주재황 朱宰璜 대법원 판사 1968.2∼1981.4
임항준 任恒準 대법원 판사 1973.4∼1980.8
이일규 李一珪 대법원 판사
1973.4∼1985.12
1988.7~1990.11(10대 대법원장)
 
하지만 이 당시 인혁당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판결이 났고, 대법원 판사는 모두 13명이었다. SNS에 돌고 있는 명단은 5명이 빠져 있는 것이다.
 
성명 한자 직책 재임기간
홍순엽 洪淳曄 대법원판사 1961.9~1976.11
이영섭 李英燮 대법원판사
1961.9~1979.3
1979.3~1981.4(7대 대법원장)
김영세 金英世 대법원판사 1969.9~1979.9
김윤행 金允行 대법원판사 1973.4~1980.8
이병호 李丙皓 대법원판사 1973.4~1981.4
 
특히 유신시대의 사법부를 이끌었던 민복기 대법원장은 친일파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민병석의 아들이다.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6년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독립운동가를 재판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관, 법무부 차관, 서울지검장, 검찰총장을 역임했고, 4.19혁명 때는 변호사로 관직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박정희 정권 하에서 법무부장관으로 기용됐고, 1968년 대법원장에 임명돼 1978년까지 무려 11년간 대법원장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사법부를 오욕의 역사로 이끌어간 장본인이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도 받았다. 2007년 타계했다.
 
유일하게 소수 의견을 낸 사람은 이일규 대법원 판사다.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여소야대 국회에서 부결되자 구원투수로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사법부를 추스린 뒤 1년 반 만에 정년퇴임했다. 2007년 노환으로 타계했는데, 사법부 역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인혁당 판결에 참여한 판사들 가운데 양병호, 민문기, 임항준, 서윤홍, 김윤행 대법원판사는 10·26사건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주장에 대한 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냈다가 법복을 벗었다.
 
특히 양 대법원판사는 서빙고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김재규 사건에 대해 "10·26 사건 이후 새 헌법을 채택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행위 당시의 체제와 재판 당시의 체제가 달라졌기 때문에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고,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행위가 국헌 문란 목적의 살인행위는 아니라는" 의견을 냈다.
 
어쨌든 이들 13명의 대법원판사들이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 내린 판결은 모두 무죄가 됐다.
 
특히 인혁당 사건은 2005년 12월 재심이 받아들여졌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피고인 8명에게 적용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같은해 8월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 637억여원(원금 245여억원+이자 392여억원)을 지급하라는 사상 최고액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인혁당 사건에 관여했던 대법원 판사들을 향한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인터넷상에서는 박근혜 후보와 당시 대법원 판사들을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권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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