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세계각국의 극단들이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한 주류가 돼 가고 있다. 그러나 옛 것과 새 것이 만나 절묘한 화학작용을 이룬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옛 것이 단순히 새 것을 만들기 위한 장신구로 사용되거나, 옛 것의 '아우라'에 갇혀 새 것이라 부르기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다. 수많은 맥베스들 중에서 일본 세타가야 퍼블리씨어터의 연극 <맥베스>가 반가운 이유다.
2010년 3월 일본에서 초연한 후 줄기차게 재공연 요청을 받은 이 작품은 올해 도쿄를 시작으로 오사카, 뉴욕을 거쳐 서울 명동예술극장에 상륙했다.
세타가야퍼블릭씨어터의 <맥베스>는 "'맥베스라는 현상'을 얼마나 현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고자 한다"는 예술감독 노무라 만사이의 말을 고스란히 증명한 작품이다.
원작을 일본식으로 빚어내는 데 주로 사용된 것은 비극적이고 상징주의적인 가무극 '노(能)'다. 원작을 현대적 해석으로 이끄는 데 활용된 것은 희극적이고 사실주의적인 대화극 '교겐(狂言)'이다. 노와 교겐이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메시지로 현대 관객과 소통한다.
일단 극단은 <맥베스>의 '현대적 읽기'부터 명확하게 끝냈다. "삼라만상 속에서 '내일'을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메시지는 공연과 팸플릿 속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고 1시간 반이라는 공연시간 동안 충실히 구현된다.
"아름다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아름답다"는 <맥베스>의 유명한 대사는 이 공연에서 삼라만상(신)과 인간의 관점이 서로 다르며 모순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즉, 욕망에 가득찬 맥베스의 파멸은 신의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 <맥베스>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는 주술적 예언으로 맥베스를 파멸로 이끄는 세 마녀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가다. 이 공연의 경우, 남자배우들이 세 마녀 역을 맡았다.
우주를 떠도는 쓰레기 봉투 속에서 누더기 차림으로 등장하는 마녀들은 흉악하고 괴기스럽게 비친다. 세 배우가 마녀 외에 현실 속 주변인물인 덩컨 왕, 뱅코 장군, 맥더프 등을 함께 맡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마녀들은 현실과 환영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욕망의 함정에 빠진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을 비웃는다.
일인다역을 위해 배우들은 무대바닥의 네모난 천과 직육면체 모양의 구조물을 적극 활용했다. 사각 천은 일차적으로 인생이라는 무대로써 기능한다.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과는 달리 마녀들은 바닥의 사각 천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일인다역을 소화한다. 또 천막을 드리운 구조물은 배우들이 다음 역할을 위해 소도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 밖에도 천과 구조물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품고 있다.
바닥의 천에 그려진 광활한 우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생이 우주를 떠도는 먼지와도 같음을 상기시킨다. 구조물은 왕좌로 쓰이기도 하는데, 맥베스가 왕위를 차지한 이후 180도 회전하며 배경을 전환한다. 처음에 물거품이 그려져 있던 배경이 거미줄 그림으로 바뀌면서, 맥베스가 헛된 욕망을 쫓다 덫에 걸렸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무대 위의 소도구와 대도구는 하나하나가 상징적 의미를 풍성히 담고 있다. 모두가 <맥베스> 읽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극의 도입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철구조물도 마찬가지다. 가운데가 원형으로 뚫린 이 철구조물 사이로 맥베스가 등장하는데, 중반부에 이르면 이 철구조물이 다름 아닌 마녀들의 주술용 솥이었음이 밝혀진다.
또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국자, 프라이팬, 망치, 빗자루 등을 꺼내 바닥을 두들기며 노래하는 마녀들의 모습에서는 '더러운 것은 아름답다'는 대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맥베스의 파멸을 예고한 마녀들의 사악한(?) 예언은 마침내 극 말미 신 혹은 자연의 보편적 섭리로 환원된다. 맥베스 부인은 무자비하게 욕망을 쫓은 대가로 영혼이 붕괴된 채 몽유병 환자처럼 무대를 떠돌다 결국 쓰러지고, 맥베스 역시 양심의 고통을 받던 도중 버남의 숲을 움직이며 진격해오는 맥더프의 기세에 짓눌려 버린다.
이 대목에서 극단은 다시 한 번 커다란 천을 활용해 주제의식에 방점을 찍는다. 버남의 숲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대형 천막은 급기야 맥베스의 몸을 덮어버린다. 맥베스의 몸은 천에 자연스런 굴곡을 그리고 그 위에 초록빛 조명이 투사되자 마치 산맥과도 같은 장대한 풍경이 펼쳐진다.
관객은 이로써 정치적 욕망과 왕위 찬탈, 그 과정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양심과 영혼의 붕괴를 목도하는 한편, 그런 거대한 사건조차 한낱 먼지처럼 여기며 인간문명의 이기심에 경종을 울리는 신의 섭리를 겸허히 깨닫게 된다.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번역 가와이 쇼이치로, 제작 세타가야퍼블릭씨어터, 각색·연출 노무라 만사이, 출연 노무라 만사이, 아키야마 나츠코, 다카타 게이토쿠, 후쿠시 게이지, 고바야시 게이타, 무대 마츠이 루미, 조명 오가사와라 준, 의상 이토 사치코, 음향 오자키 히로유키, 분장 이나가키 료지, 프로듀서 호사카 치에코, 공연은 15~17일 명동예술극장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