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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보면 상상력 발동.."끝까지 읽는 경우 별로 없어"
연극연출가 김현탁 인터뷰
입력 : 2013-07-04 오후 12:08:19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김현탁(45·사진)은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연출가 중 하나다. 널리 알려진 고전을 바탕으로 핵심 개념만 추려낸 후 과감하게 해체·재구성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사실 평단에 이름이 오르내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1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을 수상한 이후부터다. 신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에, 어느 날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나 발표하는 작품마다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김현탁 연출가)
이달 말 공개될 신작 <성북동갈매기> 준비에 한창인 김현탁 연출가를 지난 1일 서울 성북동 부근에서 만났다. 김씨는 자신이 이끄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와 함께 이달 <성북동갈매기> 공연을 마친 후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메디아 온 미디어>를 재공연하고, 12월에는 신작 <장화 홍련>을 연달아 선보일 예정이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무려 세 가지 공연에 대한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날 김씨는 지금처럼 인정받기 전 공연을 만든 후 호응을 잔뜩 기대했다가 야멸차게 외면당했던 아픈 기억도 털어놨다. 스스로에 대해 "보기보다 천진난만하다"고 소개하는 그는 당시 '나는 고립된 것인가'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기 작품에 대한 후회는 없단다. "돌이켜보면 내 시선만 강요했던 것 같다"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고립되는 것을 싫어해 "연출 구상을 할 때도 사람이 제일 많은 명동, 스타벅스 같은 곳에서 하고 외국 여행도 절대로 아프리카나 오지는 가지 않는다"는 김현탁은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이야기를 펼쳐냈다. 명작 고전의 해체와 재구성이 주특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끝까지 읽은 책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쯤 분위기는 한결 더 가벼워졌다. 타고난 달변인데다 현재에 한창 몰두해 있는 사람 특유의 열정까지 더해져 이날 인터뷰는 제법 길어졌다.
 
-배우 지망생이었다가 연출로 전환했는데 계기는?
 
▲배우에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처음에 연기를 멋모르고 했는데 그 당시 선생님들이 연기를 하기엔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셔서 충격받았다. '꿈이 배우인데 재능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뭘 고치면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여쭤보니 선생님이 내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써서 주셨다. 아마도 내가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지적하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걸 목숨걸고 했다. '이것만 해결하면 되는 거죠?' 하는 심정으로. 한 일년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그 연습만 했다. 그러고서 다음 해쯤 그 선생님께 인정받고 그 분이 하시는 다음 작품에서 주인공을 하게 됐다. 그래서 배우로 가는구나 싶었는데…
 
그때는 굉장히 겸손하지 못했다. 지금도 겸손하진 않지만(웃음). 건방지게도 연기가 재미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연기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내가 몰입하든 말든 상관 없이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하면 어떻게 보여지는구나'를 알게 됐다. 내게 원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뻔했고 원하는 걸 하다보니 보여주는 것도 뻔하게 됐다. 물론 배우로서 스스로 끄집어 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내가 일년 동안 고생해서 얻어낸 것을 무대 위에서 다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들이 생겨서 사실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있으니 선생님이 4학년 형들의 졸업작품 연출을 내게 맡기셨다. 그런데 너무 어렵더라. 앉아서 배우들 보는 것도 어렵고. 불편함의 극치였다. 너무 힘들었다. 배우 하려고 1년 동안 고생했던 것보다 나한테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 일에 몰두하게 됐다. 배울게 많은 미지의 영역, 보물상자처럼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영역처럼 여겨졌다. 나도 모르게 연출하는 데 재미가 들었다. 그 작품 끝나고도 계속 연출만 하게 됐다.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점점 너무 못한다는 걸, 하면 할 수록 너무 못한다는 걸 알아갔다(웃음).
 
-못하는 분야를 좋아하게 되나 보다(웃음).
 
▲성격적으로 문제가..(웃음) 아무튼 그렇게 작품을 만들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됐다. 원래는 희곡을 있는 그대로 무대로 옮기고 싶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원작 희곡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걸 잘 못하더라. 그때 그걸 처음 알았다. 연출을 할 때 희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연습에 들어간 적이 없다. 글이라는 것에 대해 친근감이 떨어지는 거다.
 
글에 못 다가가는 이유가 글을 읽다 보면 다른 게 먼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중간에 어느 장면에서 갑자기 무대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이렇게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글을 읽으면 글이 너무 시시하게 느껴졌다. 또 그림을 먼저 생각하고 글을 보면 앞뒤가 안 맞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그 단계부터는 글을 제쳐두고 내 그림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아니까.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원작에 없는 것들이 들어간다. 생각한 내용들을 쭉 맞춰 무대에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데 그게 내게는 최선이다. 내 능력이라기보다는. 그게 아니면 도무지 도망갈 방법이 없다(웃음). 매번 작품을 그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 인정하게 됐다. 나는 이렇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지금은 연출 스타일이 자리 잡혔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널리 알려진 고전을 토대로 작업하다 보면 배우나 관객의 반발에 부딪히기 쉬웠을 것 같다. '왜 명작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느냐, 이게 뭐야' 같은 반발도 얻었을 텐데.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배우들에게 맨날 듣는 이야기가 '이게 뭐야'다. 생각한 내용을 배우들이나 스태프와 소통하는 데에, 소통의 방식을 찾는 데에 그 동안 시간을 쓴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극 만드는 작업이 아닌, 소통의 방식을 찾는 데 연습시간의 90% 정도를 쓴다. 사실 작품에서 대강의 그림 같은 것들은 이미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내용을 배우, 스태프와 소통해야 하는데 아직도 쉽지 않고, 아직도 관객 분들로부터 ‘이게 뭐야’ 소리는 매 작품마다 듣는다. 그런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지점들이 많다. 일단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해보는데 작품이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어찌 할 수 없어지고, 다음 작품에서나 시도해봐야 하는 상황이 된다. 2008년 작인 <산불>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작품인데 관객 분들은 제일 많이 싫어하셨던 작품이다. 보기와는 달리 내가 굉장히 천진난만하다. 당시의 나는 그거 만들어놓고 굉장히 신나 하는 소년이었다. 이 작품으로 관객들과 굉장히 친해지겠다고 생각했다(웃음). 근데 더 멀어졌다.
 
-2005년 극단을 설립하기 전엔 어떤 작업들을 했나? 연출가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긴 기간이 있다. 그 시기가 연출가로서의 김현탁을 다지는 기간이었을 것 같은데. 숨기고 있는 비밀을 말해달라(웃음).
 
▲숨기는 게 아니라 특별한 일이 없어서 그렇다. 연극적으로. 96년에 학교 졸업하면서 뭔가 절실함이, 무엇을 해야겠다는 게 분명했었다. 그런데 바로 연출 작업을 할 수 있는 연계가 안 되어 있어서 우리극연구소를 비롯해 몇몇 극단을 돌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원하는 방향대로 되지 않아 그만 두게 됐다.
 
그 후 '극단을 만들어야겠다, 내 작업을 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학로에서 아는 형과 동생들 모아서 단체를 작게 만들었다. 세 작품 정도 했다. 창단공연은 울리히의 <젊은 베르테르의 새로운 슬픔>이라고, 조금 냄새가 풍기지 않나(웃음). 그리고 나머지 두 작품은 내가 직접 썼다. 써보고 싶어서 썼는데 그 때 써 본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안 된다는 걸 너무 알았기 때문에(웃음). 고전이 위대하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저 내 작품의 소재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내가 희곡을 직접 써보니 그 위대함이 드러난 거다.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못쓰는 글을 쓸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아무튼 그렇게 총 세 작품이 쫄딱 망했다. 공연을 만들어 올리기만 하는 입장이어서 홍보활동도 안 했으니 관객들도 거의 없었다. 예술 외적인 부분, 즉 예산을 만들고 단원 꾸리고 하는 게 나를 엄청나게 짓눌렀다. 연극이 아니라 외적으로 소진되니 스트레스도 너무 컸다. 일단 계속 연극을 하려면 쌓인 빚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광고 일을 3~4년 했다. 그 때 연극의 소중함을 알았다. '정말 연극이 나랑 맞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제안이 들어온 연극과 뮤지컬 작업 두어 개를 하다가 내 소신, 작업방식과 맞지 않아 2003년 하반기쯤 접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극단이 아니라 트레이닝 하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들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모였다. 그 동안 많은 희곡을 보고 '이렇게 풀어야지' 하고 적어뒀던 노트만 해도 200~300개가 될 정도였다. 그게 자산이 될 줄은 몰랐다. 고스란히 그게 있는 상태에서 2003년 말부터 2004년도까지 변방연극제, 프린지에 참가했다. 그때부터 새로 연극작업을 시작해 2005년도에 극단을 만들게 됐다.
 
-희곡을 몇 편 정도 읽나? 편수가 엄청날 것 같은데.
 
▲많이 읽는다기보다는.. 사실 전혀 의외의 대답일 수 있겠다. 그냥 솔직히 말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전체 이야기를 모른다. 체홉의 <갈매기>도 아직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일이 없다. 글하고 안 친하다 보니까. 공연작업을 할 때는 일단 장면으로 만들어 놓고 조연출한테 물어본다. '네가 봤을 때 원작하고 이거 얼마나 다르니? 큰 차이가 있니, 없니?' 하는 식으로. 그래서 그 대답을 토대로 '큰 차이가 없는데 이건 이렇게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이런 판단을 한다.
 
-연출가로서 중요한 작업방식일 수 있겠다.
 
▲그렇다. 김영수 원작의 <혈맥> 같은 경우도 거의 그 방식으로 갔다. 지금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성북동갈매기>를 준비하면서 하반기에는 뭘 할 지 동시에 고민을 하고 있다. '저번에 외국 작품 했으니까 이번에는 우리나라 것을 해야겠다' 하고 결정한다. 우리나라 것 한 다음엔 또 외국 것에 눈길이 가는 식이다. 그 중에서도 관객들이 제일 많이 아는 것을 고른다. '<춘향전>은 했었고, 이번에는 그럼 <장화홍련>? <홍길동전>?' 하며 막 생각을 한다. 대여섯 개 후보군을 놓고 각각 어떻게 풀까 고민한 다음, 그 중에서 나한테 가장 끌리는 것을 고른다. 내가 아는 <홍길동전>, 내가 아는 <장화홍련>만 놓고 생각을 하는 거다. 책을 따로 읽지 않고 그런 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많이 읽는다기보다 그냥 줄거리 정도를 이것저것 많이 아는 거다. 제목과 줄거리만 있으면 상상이 가능하다.
 
-한국 고전 중 다음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올해 12월에는 <장화 홍련>을 할 계획이다. 대강의 <장화홍련전> 내용을 아는 상태에서 일단 제목부터 놓고 생각해 본다. '장화는 레인부츠인데?' 하고 생각한 다음 레인부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 생각으로 옮겨 간다. 레인부츠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건데 그 안에 상징적인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부분이 있을까 고민한다. '홍련과 장화가 같은 인물인데 홍련은 소녀, 장화는 성인여성으로 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장화(레인부츠)를 신은 게 홍련이면, 장화(레인부츠)를 벗은 게 장화가 되는 거다. 소녀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되, 장화 하나를 놓고 상징적으로 푸는 식이다. '홍련의 장화'를 키워드로 삼고 구상 중이다. 여자소녀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홍역이 있지 않나. 예를 들면 임신에 대한 상상 같은 것들인데 그것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친 엄마를 계모로 여기게 되는 식으로 풀면 장화(레인부츠)가 의미심장해진다. '이거 하면 되겠다' 싶으면 그 때 줄거리를 읽는다. 소스를 끼워 맞추는 과정이다.
 
-지금 준비 중인 <성북동갈매기>는 체홉의 희곡 <갈매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연극의 새로운 형식에 대해 고민하는 <갈매기> 속 뜨레플레프(극중 극작가 지망생)와 연출가 김현탁이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새로운 형식으로 소통하는 것에 대한 연출가로서의 고민이 투영되는 것인지?
 
▲그렇다. <갈매기> 중 뜨레플레프의 독백 대사를 접할 때 나는 그냥 그 사람이 '나'라고 전제한다. 궁금해서 <갈매기> 속 다른 대사들도 좀 읽어봤는데 뜨레고린(극중 유명 극작가) 대사도 굉장히 길더라. 뜨레고린의 대사 또한 충분히 공감이 되는 내용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면서 예술을 한다는 게 남들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사실 소진이지 않나. 행복이라는 게 소진이 되는 것이다. 뜨레플레프는 뜨레플레프대로 또 그렇고. 그 둘이 합쳐진 게 이 작품인 것 같다. 그래도 이걸 선택하기가 쉽진 않았다. 노골적으로 연극 얘기를 하면서도 체홉은 그걸 마치 사랑이야기, 소소한 일상 이야기처럼 정말 잘 덮어 놓았다. 위대한 작품인 것 같은데 우리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이야기, 이런 느낌으로 간다.
 
이 작품은 니나(극중 여배우 지망생)가 극중극에서 독백하는 데까지밖에 안 읽었다. 니나가 극중극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나는 '아, 이거 해야겠다' 싶었다. 거기까지 읽으니 다른 부분은 보지 않아도 바꾸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의 대부분을 간이무대 위에서 진행하면 되겠더라. 그렇게 바꾸고 극에서 말하는 '새로운 형식'을 표현하기 위해 극중극에서는 객석까지 아울러 무대로 쓰면서 관객과의 대화처럼 풀려 한다. 현대에서 <갈매기>의 의미를 그런 쪽으로 풀면 떨어지겠다 싶었다. 간이무대 안에서는 정통 비극이나 희극에서 볼 수 있는 옛날 연기 방식으로 가고, 간이무대 바깥쪽은 좀더 실제적인 연기로 진행할 예정이다. 안이 드라마라면 바깥은 포스트 드라마(post drama)라고 보면 된다. 간이무대에 일상에서 연기하듯 행동했던 것, 꾸며서 대화했던 것들이 나오면 재미있겠다 싶다.
 
-작품에서 항상 특정 사물이나 이름의 중의적 의미를 탐구한다. 이것을 김현탁의 연극에서 놀이성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봐도 될까?
 
▲그렇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사상이나 개념을 잡고 작업을 한 적은 없다. 그냥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을 무대에 올리는 편이다. 어떻게 하다 내가 이걸 보게 됐는지에 대해 떠올려 보면, 사실은 마치 햄릿처럼 예전에 고립된 채 상상하던 버릇이 투영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일을 열심히 하시면서 나를 외톨이로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한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놀던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 같다.
 
<성북동갈매기>에서도 오브제들이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사실 처음에는 중의라는 말조차 몰랐다. 그걸 안 지 얼마 안 됐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할 때도 관객이 어떻게 하면 세일즈맨 윌리에 좀더 공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윌리의 땀, 침, 눈물 같은 것 보여주려고 트레드밀에서 한 시간 뛰도록 했다. 내 직관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막 한 거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랑스 연극학자 파트리스 파비스 선생님이 공연을 보신 후 페이퍼를 보내주셨다. '네가 하는 작업이 이런 작업이며 이런 맥락에서 온 거다, 포스트 드라마의 여러 부분 중에 극한으로 몰아가기라는 게 있는데 외국에서 현재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작업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하면서 쭉 설명을 해주시는데 내가 그 맥락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그 안에 있다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제가 진짜 책하고 안 친합니다,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요약만 해주십시오' 했다. 그래서 요약해서 주셨다. 그거 읽고 나서 중의성이란 걸 안 거다. 그 다음부터 그런 용어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도, 안다고 하더라도 막상 작품을 만들 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
 
-연습과정이 궁금하다. 프로덕션 과정 중에 배우와 연출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나?
 
▲그렇다. 대본을 각자 읽어와서 자기 식대로 얘기를 꺼내놓는다. '이 작품을 읽었더니 이렇게 보여요' 라고 하면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 '어, 그걸 풀면 그것도 작품이에요, 그걸 이렇게 풀면 그것 또한 작품이에요' 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네이버에서 읽고 온 것 같은 느낌의 얘기를 한다. 그러면 그건 못 쓰는 거고.. 각자의 생각을 얘기했을 때 다 듣고 '그것도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연출이 아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제가 생각한 내용으로 갑니다, 여러분들이 작품을 읽었을 때 각자 생각이 어느 지점까지 갔듯이 나도 여러분들처럼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연출이니까 내가 생각한 작품을 올리기로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진행한다. 각자의 것이 소중하다는 걸 전제로 까는 거다. 작품을 만들 때 중요한 컨셉트나 이미지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 그걸 이해시키려면 이 방식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여러분이 떠올렸던 그림이 있듯 내가 생각한 그림은 이 그림입니다, 이번에는 이걸로 한번 맞춰서 가볼까요'라고 시작한 후 나머지 부분들은 사실 배우를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들어 나가는 거다.
 
-연출가가 그린 그림을 배우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만약 첫 번째 단계에서 배우들이 이해를 못하면 나는 연습실에서 멍하니 그냥 앉아있어야 한다.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어떤 부분을 해줘야 그걸 통해 그 다음이 연결될 텐데 닫아버리면 곤란해진다. 그래서 작품에 대해 내가 읽은 방식을 배우에게 이해시키는 데 시간을 제일 많이 할애한다. 맨 처음 중요한 신 하나를 놓고, 배우들이 머리 속에 생각했던 이미지를 설명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이 장면 안에서 연기 되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여기서 이렇게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첫 연습 장면이 이해가 되면 그 다음 장면들은 쉽다. 그 장면이 이해 안되면 나머지도 어렵다. 만약 장면의 소화가 잘 안되면 다른 장면을 조금 먼저 하기도 한다. 근데 지금도 이달 말 공연할 <성북동갈매기>에서 그 '중요한 장면'을 연습하고 있는데 어려워들 하고 있다.
 
-올 가을에 열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는 <메디아 온 미디어>가 공식 초청 받았다. 대규모 공연예술제에 초청된 소감은? 인정 받았다는 느낌이었나?(웃음)
 
▲인정 받았다기보다.. 인정이 늦었다는 생각?(웃음) 왜냐면 그 동안 SPAF의 문을 많이 두드렸기 때문이다. <메디아 온 미디어> 이전에 많은 작품들로 참가 신청을 계속 해 왔었는데, 그 당시에는 신청해서 떨어지면 그게 되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른 건 몰라도 국제공연예술제는 이 작품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다른 데서 다 퇴짜 맞는다고 해도 여기는 퇴짜 놓으면 안 되는데 이상했다(웃음). 근데 이번에 SPAF에서 초청받으니 '이제야 조금 공연예술제의 의도와 내가 만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웃음).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대다.
 
▲너무 기다렸던 일이다. 음, 세계적 예술가들과 맞장 뜰 연출가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됐고 그게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고..(웃음). 진짜로 개인적으로 작품을 하면서 배우들한테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세계적 예술가들과 어깨 나란히 하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고, 나를 위해서나 한국 연극을 위해서나 빨리 외국에 노출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래야 반성할 걸 빨리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아트마켓인 팸스(PAMS)도 처음에 참여했을 때 굉장히 고무됐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싶어서다. 그렇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공연을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더라. 실망감을 장문의 메일에 담아 팸스 쪽에 항의하기도 했었다. 올 가을 SPAF에 참가하는 <메디아 온 미디어>의 경우 첫날 공연이 마침 팸스의 마지막 날에 맞물려 해외 공연시장에 노출된다고 하더라. 어떻게 해서든 내가 신경써서 잘 만들어 해외와 네트워크를 이어갔으면 한다. 해외 진출을 빨리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지금 연습실이 위치한 성북동은 김현탁 연출에게 어떤 의미인가?
 
▲성북동에 위치한 연습실 겸 극장인 ‘일상지하’는 지금의 내가 있게 한 전부다. 만약 이걸 안 했으면.. 상상하기 싫다. 되게 건방지지만, 사실 2008년 <산불>과 <김현탁의 햄릿> 끝냈을 때 지금 누리는 정도를 누렸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 때는 내가 너무 심하게 내쳐졌다. 돈도 없으니 작업을 못하고, 대관도 어렵고, 배우들도 없고, 배우들이 모여도 아르바이트해서 겨우 밥 먹고 그랬다. 고통스러워서 내린 결론이 '대학로를 떠나자' 였다. 마지막으로 지방으로 내려가든가 하는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이 공간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여기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월셋방 돈을 빼서 이리 들어온 거다. 여기에 들어와서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작품을 미친 듯이 연습했다. 2010년 첫 해에 여기서 여섯 작품을 했고, 두 해에 걸쳐서 열 한 작품을 만들었다. 지금 공개된 작품들이 대부분 그 때 나왔다. 이 공간이 없고, '성북동비둘기'가 없었으면 내 작품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정말 중요한 곳이다.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를 이곳에서 언제까지 운영할 계획인가?
 
▲주위 환경이 변하면서 월세가 미친 듯이 오르고 있다. 너무 비싸서 곧 나가야 할 것 같다.
 
-경력도 쌓여 가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안정된 생활 기반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제의가 들어온다 해도 안 할 거다. 나한테는 작품이 우선이고, 나는 작품 만드는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는 한다. 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특별하게 나누는 일을 해보고 싶다.
 
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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