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케냐 출신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8)의 귀화 추진이 진통 끝에 무산됐다. 에루페 측 대리인인 오창석 백석대학교 교수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며 더는 귀화 추진을 할 수 없는 환경에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대한체육회는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대한체육회 13층 회의실에서 제1차 스포츠공정위원회를 열고 에루페에 대한 '우수인재 특별귀화 추천'을 심의한 결과 특별귀화 추천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에루페가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설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사라졌다. '일반 귀화'가 있지만 국내에서 5년간 체류해야 하기 때문에 마라토너로서는 쉽지 않은 조건이다.
지난해 6월 충남 청양군체육회에 입단한 에루페는 "한국으로 귀화해 2016 리우올림픽에 출전하겠다"고 귀화 의사를 드러냈다. 이에 에루페의 대리인인 오창석 백석대학교 교수 또한 에루페가 머물 집을 청양 인근에 마련하고 주변을 그의 '마라톤 길'로 추진하는 등 귀화에 박차를 가했다.
앞서 에루페는 2011 경주국제마라톤, 2012 서울국제마라톤, 2012 경주국제마라톤을 연이어 1위로 돌파하며 주목을 받았다. 귀화 의사를 밝힌 이후에도 2015 서울국제마라톤에서 변함없이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지난달 20일 열린 2016 서울국제마라톤에서도 2시간05분13으로 국내 개최 마라톤 최고 기록을 작성하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에루페의 귀화를 가로막은 것은 기량이 아니었다. 국내 육상계 일부는 마라톤이라는 스포츠의 특성과 국민 정서를 내세워 에루페의 귀화 반대를 적극적으로 내비쳤다. 손기정으로 상징되는 '국민 스포츠' 마라톤에 피부색이 다른 선수가 뛰는 것을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에루페의 과거 도핑 징계 이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루페는 지난 2012년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인 '에포(EPO)'가 검출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으로부터 2년간 자격정지를 받은 바 있다. 에포는 적혈구 증가를 통해 산소 운반능력을 향상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장거리 육상과 사이클 선수들이 유혹에 빠지기 쉬운 약물로 분류된다.
에루페의 귀화를 반대하는 입장에선 도핑 전력이 귀화에 가장 민감한 이슈가 됐다. 반대로 에루페 측과 그의 귀화를 찬성하는 쪽에선 이 문제를 제대로 소명하는 게 핵심이었다. 실제로 한 체육계 관계자는 지난 5일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최근 WADA(세계반도핑기구)와 IAAF가 케냐 도핑 문제와 관련, 러시아처럼 케냐 선수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금지 할 것으로 안다"며 "만약 이게 확실시 되면 에루페가 귀화하더라도 논란이 예상된다. 자칫 그런 움직임을 회피하기 위해 한국을 택했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에루페와 오창석 교수는 이를 케냐 지역의 특수성에 따른 '단순 약물 처방'이라고 해명하기 위해 힘썼다. 케냐 현지에서 2012년 말라리아 치료 당시 진료기록부와 처방전 등 문서 20여장을 대한육상경기연맹을 통해 대한체육회에 제출했다.
오창석 교수는 "케냐 지역의 특성과 그에 따른 말라리아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라며 "이미 2년간 자격정지도 끝났다"고 꾸준히 해명했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지난 1월 특별귀화 추천 심의에서 이를 증명할 근거가 부족하다며 추천을 보류한 바 있다. 이날 최종 심의에서도 대한체육회는 "치료 목적으로 약을 쓰겠다고 할 때 신청하는 치료목적 사유 면책특권 제도라는 게 있다. 하지만 에루페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며 "징계를 받았을 당시에도 고의성이 없었다면 이의신청을 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귀화 불가' 심의 직후 오창석 교수는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정말 아쉽다. 귀화를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더는 한국에 미련은 없을 것 같다"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어 오 교수는 "도핑 전력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이미 징계도 다 받았다. 2년간 고생한 게 너무 억울하다"면서 "이제 다 끝난 셈이 됐다. 청양군청하고 앞으로 계획에 대한 회의를 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오 교수는 "사실 작년에 좋은 에이전시를 통해 더 좋은 국가에서 더 많은 돈을 주고 에루페를 데려가겠다는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에루페는 한국에서 뛰겠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케냐 선수들이 돈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속된 말로 하나에 필이 꽂히면 돈은 조금 못 벌더라도 그걸 보고 간다"면서 "에루페도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나 더 많은 돈을 받는 것 등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지도자까지 생각했다. 귀화 하나만 보느라 작년부터 올해까지 스폰서비를 하나도 못 받았다. 결과적으론 10만불 정도를 손해 본 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오 교수는 "솔직히 한국이 이 정도로 쇄국적인 줄 몰랐다. 에루페 같은 선수가 나와 우승을 하고 그러면 우리 다문화 가정 쪽에도 긍정적인 일"이라며 "청양도 1년에 20억원 정도를 마라톤을 비롯한 스포츠마케팅에 쓴다. 이미 마라톤 훈련지로 각광받고 있다. 에루페의 귀화만 떨어지면 마라톤 흙길 사업 추진이나 마라톤 훈련지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약속까지 전부 청양군청으로부터 받아둔 상태였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오 교수는 "혼자 독주해서 6번을 우승한 선수는 에루페가 유일하다. 제가 개인적으로 케냐를 오간 게 16년째인데 그러던 중 한국을 오겠다는 선수를 처음으로 만나 여기까지 왔다. 나중에 에루페가 다른 나라로 가서 금메달을 따면 그땐 무슨 소리가 나올지 궁금하다. 오늘 귀화 불가 방침은 체육사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 본다"고 토로했다.
에루페의 한국 이름은 '오주한'이다. 대리인 오창석 교수의 성을 딴 '오'에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뜻을 덧붙여 '주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극마크를 단 오주한이라는 마라톤 선수의 탄생은 없던 일이 됐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특별 귀화를 신청한 케냐 출신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 사진은 지난 1월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회관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제21차 법제상벌위원회에 참석해 대한민국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