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문재인 대통령은 3월 26일 대통령 개헌안을 발의하여 여야의 지지부진한 개헌 논의에 경종을 울렸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는 6.13 지자체 선거 때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일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2017년 1월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출범한 이래 여야 협상은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시간만 까먹는 식물위원회로 표류하고 있다.
대통령의 개헌안 제출에 대한 일반 국민과 이른바 식자층의 판단은 사뭇 다르다. 리얼미터가 3월 29일 발표한 ‘대통령 개헌안 발의’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찬성 여론은 64.3%로 꽤 높다. 반면 식자층의 판단은 긍정 보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헌법 학자들은 대통령의 개헌 발의권은 유신헌법에서 삽입되었던 것으로 권위주의적 독재를 상징하며, 제5공화국 이래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비판한다. 어차피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국회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제출이라는 지적이다.
찬성 의견도 만만찮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로 팽팽히 대립해 온 여야가 합의 개헌안 마련에 물꼬를 텄다는 점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개헌 논의는 다음 총선이나 대선 때까지 무한정 미뤄져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시대의 변화와 가치를 담아내는 헌법 개정이 사실상 무산된다는 것이다.
국민과 약속한 개헌에 대해 내용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대통령에게 부여된 책무이다.
대통령은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을 추가하였다.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해 대의민주주의제를 보완하라는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하고,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수준 임금 지급 노력 의무’를 부과해 성별 고용형태별 차별에 대한 해결 의지를 높였다.
그런데 여야의 정치 갈등은 헌법 개정 논의를 후퇴시킨다. 본질보다는 몇 가지 단어나 정치공방으로 개헌 논의를 혼탁하게 만든다.
자유한국당의 태도는 덩치 값 못하는 코끼리와 같다. 자유한국당은 대통령의 개헌안 제출은 관제 개헌이며 그 내용은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새빨간 개헌안이라 강변한다. 대통령의 개헌안이 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개편하려는 음모가 담겨져 있다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회주의개헌저지투쟁본부를 구성하여 결연히 맞설 것이라 선언하였다.
대통령의 헌법 개정안에 사회주의 논란이 제기되는 대목이 무엇인가. 자유한국당은 그 예로 토지공개념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꼽는다. 투쟁본부 김무성 위원장은 토지공개념은 현행 헌법 정신에도 담겨 있는데 대통령의 개헌안에는 권력 뜻대로 국유화하도록 하는 내용이라고 비판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노동가치론이라고 밝혔다. 개정안을 그대로 적용했다간 자유 시장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경제가 몰락의 길로 간다고 선동한다. 임금원칙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아닌 ‘동일성과 동일임금’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의 주장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 정치공세인가는 금방 드러난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2016년 4.13총선 공약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제시한바 있으며, ’17년 12월 13일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가 발표한 키움과 나눔의 쌍끌이 경제 혁신안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법제화를 주장하였다. 6년 전도 아니고 불과 6개월 전에 자유한국당 스스로 국민에게 약속한 내용을 대통령이 헌법 전문에 포함시켰다면 환영할 일이지 사회주의 개헌이라 매도할 일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시대정신과 국민 염원을 담아 조속히 개정되어야 한다. 개정 방향은 권력 구조의 개편과 함께 국민의 기본권 신장 내용을 담아야 한다. 마침 양대노총은 3월 6일 ‘일하는 사람의 헌법 8대 핵심과제’를 제시하고 국회의장에게 전달하였다. 8대 핵심과제는 “모든 사람의 일할 권리, 적정임금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노동3권의 온전한 보장, 사기업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복원과 노동자의 경영참가권 보장, 기반시설 공공서비스와 보건의료 공공성 원칙,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실질화, 성평등 권리의 구체화와 실질화, 안전권과 건강권의 확대”가 포함되어 있다. 더 이상 개헌 논의를 국회에만 맡겨 둘 수 없다. 2천만 노동자의 이해가 대변되지 않는 개헌 논의는 사상누각이다. 일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행동으로 다시 한 번 결집할 때이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