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청원이 동네 주민센터보다 가까운 시대다. 한 달 안에 20만명 이상 추천하면 정부·청와대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미세먼지, GMO, 미혼모, 미투, 경제민주화, 가상화폐, 청소년 등 실로 다양한 이슈들이 국민들의 공감대를 얻었다.
하지만, 장애인 관련 청원은 아직 단 한 건도 20만명을 넘기지 못했다. 장애인 관련 청원 중 많은 추천을 받은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을 보장해주세요’조차 간신히 5000명을 넘겼을 뿐이다. 시각장애인 사이에서 꽤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겪을 법한 이슈에는 반응을 하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장애인'은 장애인들만의 일이다.
국내에 시각장애인은 28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선천적이나 출산 과정에서 돌 이전에 시각장애를 얻은 경우는 4.4%로 시각장애인 20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 10명 중 7명 정도, 22만명은 성인인 20대 이후 시각장애를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얻는다. 가장 많이 시각장애를 얻는 나이는 50대다.
최근 미국도 인구의 급속한 노령화에 따라 노인성 백내장, 황반변성, 녹내장, 노인성 망막질환 등으로 인한 시각장애 출현율이 증가하고 있다. 향후 30년 안에 미국의 시각장애인구는 현재의 약 두 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역시 노인성질환에 의해 시각장애 비율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안 갖고 있는 사람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질병, 특히 고령화에 따른 노인성 질환으로 일생 중 일정기간은 시각장애인으로 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나 혹은 우리 중 누군가가 시각장애인으로 살만한 환경인가. 흰지팡이가 있어도, 시각장애인 문자라는 점자를 배워도, 보행훈련을 받았어도 시각장애인의 자립은 아직 먼 얘기다. 여전히 시각장애인이 보일러 온도조절장치를 다루지 못해 숨진 채 발견되거나, 잘못된 비상구 안내로 건물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는 사회다.
세상이 4차산업혁명으로 좋아졌다고, AI 스피커가 음악을 틀어줘도, 스마트폰으로 대화나 길찾기가 가능해도, 당장 눈 감으면 10m 앞도 걷기 힘들다. 시각장애인들은 버스 타는 것을 도착시간, 도착순서, 승하차 등의 어려움을 이유로 아예 피할 정도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노인과 장애인에게 편리하면 비장애인에게도 편리하다는 ‘공용품’이란 개념이 정립됐다. 고령화사회와 고령 시각장애인 증가를 의식해 한 주류회사가 캔에 점자를 표기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회사가 증가하며 확산됐다. 국내에서도 일부 주류회사가 점자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최근 국내에서도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개념이 얘기되고 있다. 배리어 프리, 접근성 운동의 연장선인 유니버설 디자인은 사용자가 나이·성별·장애 등에 상관없이 위험을 겪지 않고 편하게 이용하도록 만든다. 첨단·고급이라는 미명 아래 미학적이고 복잡한 디자인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갖춘다면 시각장애인들도 손쉽게 작동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가전제품에 있는 수십가지 버튼 모두가 점자로 표기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생활용품의 깨알같은 글씨로 된 제품정보를 다 읽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시각장애인 전용 제품 같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당연하게 하는 일을 그들도 하는 것이다. 나도 당신도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다.
박용준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