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광연·최영지·홍연 기자] 사법농단 의혹 핵심 책임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검찰의 대면 조사가 시작됐다. 477일 전에는 사법부 수장이었던 그는 이제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해 조사를 받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앞서 예고한대로 11일 오전 9시쯤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입장을 발표했다. 검은색 양복과 코트, 흰 와이셔츠에 회색 넥타이를 맨 그는 미리 준비된 포토라인에 서서 원고 없이 입장을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은 “무엇보다 먼저, 제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일로 국민 여러분께 이토록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면서 “이 일로 법관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사기관의 조사까지 받은 데 대해서도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심경을 밝혔다. 또 “이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태와 관련된 여러 법관들이 각자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법률과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이 이어지는 동안 대법원 정문 앞은 일찍부터 진을 치고 있던 시위대 구호 소리로 떠나갈 듯 해 양 전 대법원장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날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노조는 전국 법원본부 간부들을 소집해 양 전 대법원장의 대법원 입장을 막기 위해 대법원 입구를 막아섰다. 이들은 "피의자 양승태는 검찰 포토라인에 서라"며 시위를 벌였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핵심 피의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입장 표명 뒤 짧게나마 취재진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왜 포토라인이 준비된 서울중앙지검이 아닌 대법원에서 입장을 발표하느냐는 질문에 "대법원에서 기자회견을 한다기 보다는 전 인생을 법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서 수사과정에서 한번 들렀다 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고 답했다.
대법원 앞에서의 입장발표가 후배 법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아까도 말씀 드렸 듯 그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상태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부당한 인사개입이 없었다는 기존 입장에 대해 묻자 "변함 없는 사실이다. 제가 누차 얘기했듯 그런 선입관을 갖지 마시기 바란다"고 일축했다.
질의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동행한 최정숙 변호사가 다가와 귓속말로 "이 정도 하시죠"라고 속삭였고,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시간이 다가와 부득이 그치겠다"며 승용차에 올랐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 수사 착수부터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소환까지 7개월이나 흘렀지만 그가 대법원에서 서울중앙지검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불과 7분 정도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이 '강제징용 재판에 개입 했는데, 사법불신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피의자 신분인데 심경을 밝히셔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질문을 쏟아냈지만 굳게 입을 다물고 청사 중앙 현관을 가로질러 중앙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전직 대법원장이라면 의전용으로 마련돼 있는 금색 엘리베이터에 탔겠지만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은 일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5층 조사실로 올라갔다. 피의자 신분임을 고려한 검찰 방침으로 보인다.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된 조사는 서울중앙지검 청사와 울타리 내가 철저히 통제된 상태에서 진행 중이다.
이날 대법원과 서울중앙지검 청사 주위 등 서초동 일대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비판과 응원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이 있었던 대법원 정문 앞에서는 법원노조 등이 집회를 열었고, 노조원들은 "여기는 더 이상 당신이 근무하는 대법원이 아니다", "법원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고 크게 외쳤다.
이어 양 전 대법원장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서울중앙지검에는 애국문화협회 등이 '양승태 대법원장님 힘내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민중당 등과 마찰을 빚어 고성이 오갔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핵심 피의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입장발표를 하기 위해 포토라인으로 들어서고 있다. 법원노조는 출입구를 봉쇄하고 '양승태 구속하라' 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광연·최영지·홍연 기자 yj1130@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