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경찰이 지난해 10월 경기 고양시에서 발생한 '저유소 화재 사건' 피의자인 외국인 노동자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하는 등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가 "경찰이 피의자인 외국인 노동자를 신문하면서 반복적으로 '거짓말 하는 거 아닌가요?'라면서 진술을 강요했고, 언론사 기자들에게 이름·국적·나이·성별 및 비자의 종류를 기재한 문자메시지를 발송해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며 낸 진정사건에서 "경찰은 헌법상 진술거부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고 20일 밝혔다. 인권위는 이와 함께 피해자를 신문한 경찰관 소속 경기고양경찰서장과 경기지방경찰청장에게 해당 경찰관에 대한 주의조치와 재발방지를 위한 소속직원들에 대한 직무교육 실시를 권고했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경찰관의 거짓말 발언은 피해자가 피의자로서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진술할 때나 피의자 진술 자체를 부정하는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며 "이는 사실상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것으로 현행 형사사법체계가 인정하는 정상적인 신문과정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의자신문은 체포 구속 여부와 무관하게 임의조사에 해당하고, 이 과정에서 설사 명백한 증거가 있더라도 피의자 진술과 배치되는 객관적 진실은 그 자체로 피의자 진술을 탄핵하는 증거로서 가능한 것이지 피의자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를 근거로 압박과 강요를 하는 것은 합리화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또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이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고 언론사의 취재 등으로 국민에게 상당히 알려진 사건으로 피의사실 공표의 필요성이 있더라도 경찰이 피의자의 이름, 국적, 나이, 성별 및 비자의 종류까지 상세하게 공개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며 "국민 관심사는 국가 주요기반시설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이지, 공적인 인물이 아닌 이주 노동자의 신상정보라고 보기 어렵고, 설사 국민적 관심사가 개인의 개인정보에 관한 것일지라도 수사기관 스스로 무죄추정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에 따라 공표행위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특히 "경찰관의 피의자 신상정보 등의 공개로 인해 피해자 개인은 물론이고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무관한 이주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악화시키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실화 가능성에만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게 해 안전관리 부실 문제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집중하지 못한 결과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경찰은 2018년 10월 경기 고양시 저유소에서 발생한 화재 원인으로 화재 당일 저유소 인근에 떨어진 풍등으로 지목하고 풍등을 날린 외국인 노동자 A씨를 긴급 체포했다. 경찰은 이후 4차례에 걸쳐 28시간 50분 동안 A씨를 신문하면서 "거짓말이 아니냐",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말이다"라는 말을 총 123회 반복하는 방법으로 A씨를 몰아붙였다. 경찰은 또 A씨를 검찰로 송치하기 전 기자들에게 신상명세를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내 신분을 노출시켰다.
경찰은 A씨에 대해 중실화죄를 적용해 구속영장 청구를 검찰에 신청했지만, 검찰은 "풍등과 저유소 화재 간의 분명한 인과 관계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며 반려했다. 결국 경찰은 A씨를 기소의견으로 불구속 송치했으며 검찰은 조만간 A씨의 기소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지난해 10월7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고양시 대한송유관공사의 지하 탱크에서 불이 나 소방 당국이 진화작업을 하고 있는 가운데 소방당국 관계자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