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매일 새로운 소식이 수천 건씩 쏟아지는
‘뉴스의 시대
’, 이제는
‘구문
(舊聞)’이 된 어제의 신문
(新聞)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를 기록해보고자 준비했습니다
. 네 번째 주제는
1950년대
'부부의 세계
'입니다
. 뉴스토마토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
1954년 4월29일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아침 열 시부터 약 세 시간 동안 10여 건의 이혼 소송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지금이야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를 의미하는 조이혼율이 2.2건에 이르고 소송도 많지만, 조이혼율이 0.2건에 불과하던 당시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재판 모두 법원장인 김준원 판사가 직접 주심을 맡았는데, 특이한 건 이혼을 청구한 원고가 모두 남자였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서울 신설동에 사는 송영철(가명)씨는 해방 전, 그러니까 당시로부터 적어도 10년 전에 집을 나간 아내 이정순(가명)씨와 이제와서 법적으로 이혼을 시켜달라는 요구였고요. 중국에서 태어난 김성수(가명)씨는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 아내 박영자(가명)씨와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잘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 영자씨가 젊은 남자랑 바람이 나 도망쳤다는 사연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독 여성들만 남편을 두고 집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까요?
사정은 바로 해방 이후 우리만의 독자적인 법체계 수립을 위해 1953년 제정한 형법 241조 1항 간통죄에 적용된 쌍벌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간통은 결혼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범죄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황당하고 부당한 일이지만, 남성이 공공연히 둘째 부인, 셋째 부인을 두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랬을 수 있겠다' 싶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 간통죄가 이제 남성에게도 적용되면서 남녀 모두 배우자와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도를 하게 되면 그 상대방과 함께 형사처벌을 받게 된 것이죠.
실제로 10여 건의 이혼 소송이 봇물 터지듯 제기되기 전날인 1954년 4월28일 '쌍벌간통죄 제 1호' 재판이 열렸다고 합니다. 당시 언론은 이를 '쌍벌죄가 낳은 새로운 현상의 하나' 라고 기록했습니다.
형법상 간통죄는 2015년 2월 26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9명 중 7명의 위헌 의견으로 효력을 잃었습니다. 당시 헌재는 간통죄가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해 헌법에 위반한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물론 민사상 위자료 청구 등의 법적 절차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종합해보면 간통죄는 처음엔 남성의 자유만 허용하다, 1950년대부터 약 62년간 남녀 모두의 자유를 제한했고,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남녀 모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간통죄 폐지의 의미엔 '법 없이도 성숙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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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