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학술지에 게재되기 이전의 연구 논문을 공개해 학문적 논의와 검증을 앞당기기 위한 온라인 논문 공개 플랫폼 프리프린트 서버(preprint server)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프리프린트 서버는 1990년대 초 인터넷 기반 학술 공유 네트워크의 성립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arXiv는 물리학과 수학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동료 심사(peer review)를 기다리는 논문을 빠르게 공개하는 창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모델은 인간 연구자의 책임 있는 저술과 동료 연구자의 검토를 전제로 구축되었고, 바로 그 점이 학술 출판의 신뢰성을 보장해왔습니다.
AI가 쓴 논문과 AI에 의한 리뷰를 허용한 사전 논문 공개 플랫폼 aiXiv. (이미지=Gemini 생성)
전통적으로 연구자들이 동료 심사를 거치기 전에 초고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쓰였던 arXiv 같은 플랫폼과는 달리, 최근 등장한 aiXiv은 AI가 작성하고 AI가 검토까지 수행한 논문을 수용하고 게재하는 최초의 전용 서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플랫폼은 과학 출판이 오랫동안 전제로 삼아온, 인간 연구자가 논문을 쓰고 인간 심사자가 이를 평가한다는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AI, 과학 연구 주체될 수 있나?
aiXiv은 이러한 전통적 모델을 뛰어넘어 인공지능을 학술 생태계의 적극적 주체로 인정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플랫폼은 AI가 작성한 논문과 AI에 의한 사전 검토(prereview)를 거쳐 수정·보완된 원고를 받아주고, 인간 연구자의 기여 여부와 무관하게 게재를 허용합니다.
aiXiv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맨체스터대 박사과정 학생 구웨이 황(Guowei Hwang)은 “AI가 생성한 지식을 다르게 취급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누가 생산했는지가 아니라 질에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논리는 기존 학술 커뮤니케이션이 ‘누가 썼는가’보다 ‘무엇을 증명했는가’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과 결을 같이합니다.
aiXiv은 AI 저술·AI 심사 시스템과 인간 연구자의 논문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개방형 생태계를 지향하며,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를 갖추어 인간과 AI 과학자가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연구 네트워크 구축을 지향합니다.
최근 연구들은 대형언어모델(LLM)이 단순한 요약을 넘어 데이터 해석과 실험 설계, 결론 도출에 이르기까지 논문 초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부 사례에서는 AI가 생성한 논문이 인간 연구자의 작업과 유사한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처럼 AI의 연구 참여가 전 과정으로 확대되면서, “AI를 과학적 논문 생산의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AI가 작성하고 AI가 사전 검토한 논문을 수용하는 프리프린트 서버 aiXiv은 이러한 변화를 제도적으로 실험하는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가 과학계 전반에서 곧바로 수용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AI가 생성한 논문의 신뢰성과 정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신이 있으며, 오류나 허위 정보가 포함될 경우, 책임 소재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또한 AI의 작업이 새로운 지식 생산인지, 기존 연구의 재조합에 불과한지를 가르는 기준도 모호합니다.
지난 11월19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 RTO에서 열린 제5회 한글실험프로젝트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에서 관람객들이 인공지능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나아가 AI가 논문을 쓰고 또 이를 검토하는 시스템은 자기 검증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사이언스를 비롯한 많은 학술지는 여전히 AI로 생성된 원고를 아예 금지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술지는 AI를 활용한 논문 작성은 허용하지만, 그 사실과 비중을 공개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과학 출판의 신뢰를 떠받쳐온 “인간 중심의 심사 체계를 AI가 대체할 수 있는지”가 이제 피할 수 없는 의제가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arXiv는 최근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특정 쟁점에 대한 저자의 입장·관점·문제의식을 분명히 밝히는 입장 논문(position paper) 제출에 대해 사전에 공식 심사된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AI 생성 논문의 홍수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AI가 자동 생성한 저품질 서베이 논문이 많아지면서 플랫폼 운영에 부담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AI 콘텐츠, 학문적 가치 평가 대상으로
이러한 방침 변화는 학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기존 프리프린트의 근간을 흔든다고 비판하는 반면, 다른 연구자들은 품질 관리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 arXiv 같은 전통적 프리프린트 서버는 그간 자율적 심사 기반의 공개·피드백 시스템으로 기능해왔지만, AI 생성물의 양산은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학문적 가치 평가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 심사자의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AI 기반 사전 리뷰 시스템이 연구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현실론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물학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인 bioRxiv와 medRxiv를 운영하는 openRxiv는 지난달 사전 공개 논문에 대한 신속한 피드백을 위해 AI 검토 도구를 추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aiXiv의 출현은 과학 저널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AI는 이미 연구 생산의 다양한 측면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이제는 논문 저술과 사전 평가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기회이자 도전이며, 과학계는 변화 속에서 과학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규범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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