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세은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최후통첩 시한을 1시간30분가량 앞두고 2주간의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히며 종전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넘게 이어진 이란 전쟁 여파로 치솟은 국제유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가격 부담과 전기차 인프라 문제로 주춤했던 전기차 시장은 다시 ‘경제성’이라는 동력을 확보하며 반등의 계기를 맞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동 정세 변화로 에너지 수급 차질 우려가 커지면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와 이를 뒷받침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에너지 구조 전환을 앞당기며 K배터리 산업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전기차가 충전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실제 주유소 가격에도 고유가 충격이 빠르게 반영되면서 소비자 체감 부담도 커지고 있습니다. 8일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기준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은 리터(ℓ)당 2010.9원으로 전날보다 8.1원 올랐습니다. 경유 가격도 7.9원 상승한 1991.3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 지역 휘발윳값이 2000원들 돌파한 건 3년8개월 만입니다. 고유가 국면이 이어지면서 전기차 수요도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국내에서 신차로 등록한 전기차는 총 8만3529대로, 지난해 1분기(3만3482대)보다 149.5% 증가했습니다. 1분기 전체 신차(41만3049대) 중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도 20.2%에 달했습니다. 하이브리드차의 경우 10만9167대로 지난해보다 3.4% 증가했고, 같은 기간 경유차는 49.1% 감소한 1만4353대에 불과했습니다. 고유가 국면에서 전기차의 경제성이 다시 부각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상승할수록 내연기관 차량의 운행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지비용이 낮은 전기차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인 SNE리서치는 이란 전쟁으로 유가가 치솟으면서 전기차 시장의 회복기를 당초 예측보다 2년 이상 앞당겼습니다. 전쟁 이전인 지난 1월에 예상한 올해 글로벌 전기차 침투율(신차 중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27%였으나, 이를 29%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내년의 전기차 침투율은 기존 전망치였던 30%를 35%로 상향했고, 2028년 전망치는 34%에서 41%로 올렸습니다. 오익환 SNE리서치 부사장은 “향후 유가가 안정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항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전기차의 조기 도입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업계 관계자도 “유가 상승 이후 전기차로 전환하려는 수요가 서서히 늘고 있다”며 “아직 캐즘을 완전히 벗어난 수준은 아니지만, 고유가가 수요 회복의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재생에너지도 확대…ESS 동반 성장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는 전기차뿐 아니라 에너지 시장 전반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중동산 원유 핵심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각국이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석유·액화천연가스(LNG) 같은 화석 연료와 달리 자체 생산이 가능합니다. 다만 날씨 등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져 풍력 등을 주력 에너지원으로 삼으려면 생산된 전기를 저장할 ESS와 이를 실어 나르는 전력망이 필수입니다. ESS는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시스템입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ESS 시장 경쟁도 점차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거래소가 추진하는 1조원 규모의 2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이 대표적입니다. 이번 사업은 육지 500메가와트(MW), 제주 40MW 등 총 540MW 규모로 충·방전 6시간이 가능한 ESS 설비를 구축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앞서 진행된 1차 입찰에서는 삼성SDI가 약 80%의 물량을 확보하며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SK온 컨테이너형 ESS 제품. (사진=SK온)
그러나 이후 진행된 경쟁에서
삼성SDI(006400)는 35.7% 점유율로 낮아지며 2위로 내려앉았고
LG에너지솔루션(373220)은 약 14% 물량을 확보했습니다. SK온 역시 상당한 물량을 확보하며 시장 확대에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배터리 업계는 반복되는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가 에너지 안보 전략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석유 중심의 에너지 구조에서 재생에너지와 전력 저장 중심 구조로 전환이 빨라질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 변수로 떠오른 것은 리튬배터리의 원재료인 리튬과 니켈, 코발트 등 광물 공급망입니다. 광물에 대한 공급망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며 ‘하얀 석유’라는 별칭까지 붙었습니다. 과거에는 원유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배터리 광물 공급망 확보가 산업 패권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질수록 전력망 안정성과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진다”며 “재생에너지 연계형 저장장치나 산업용·유틸리티용 ESS 수요에는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글로벌 배터리 업체들이 최근 EV 중심에서 ESS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는 만큼, 이번 유가 상승은 K배터리 업체들에는 전기차 회복 기대와 ESS 확대 가능성을 동시에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촉발된 고유가 국면은 단순한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산업 지형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ESS까지 이어지는 에너지 전환 속에서 배터리 산업은 더 이상 미래산업이 아닌 현재의 핵심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가 급등이 촉발한 에너지 구조 변화를 앞당기면서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확대, 나아가 K-배터리 산업의 시계도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끝>
오세은 기자 os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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