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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대통령이 바뀌면 뭐하나, 내가 먹는 라면은 그대로인데
2017-04-03 08:00:00 2017-04-03 08:00:00
“사람은 자고로 밥을 먹어야 한다.” 모처럼 외할머니 댁에 내려갔더니 흰쌀밥을 고봉으로 쌓아주신다. “자취하느라 밥 많이 못 먹지? 이럴 때라도 많이 먹어둬.” 차마 매끼 라면으로 때운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의 말마따나 밥이 보약이다. 이럴 때 아님 밥 먹을 기회도 없다. 누군가 대학생의 주식을 묻거든 고민 없이 라면이라 답하겠다. 아니, 정확히는 면이다.
 
짜장면, 냉면, 파스타는 물론 김치찌개에 넣는 사리면, 닭갈비에 볶아먹는 쫄면까지 온갖 면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값이 싸다. 세계적으로 비싼 등록금, 만만치 않은 주거비를 부담하는 상황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중심으로 나물이나 찌개 등 이것저것 갖춰진 ‘제대로 된 밥상’을 매 끼니에 마주 대하는 건 사치에 속한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밥상’ 한 끼 값이면 면식 두세 끼를 충당할 수 있으니 라면을 먹는 게 합리적인 청년이 할 합리적인 선택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면식이 주식의 위치를 넘보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밀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년 우리나라 밀 자급률은 1.2%다. 흔히 먹는 밀은 모두 수입산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의 토양은 현대의 밀 소비량을 감당할 수 없다. 이전엔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밀의 소비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다. 외국과의 무역이 적극적으로 활성화한 계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국민영양개선령을 통한 혼분식장려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67년에 설립된 한국영양학회는 한국영양학회지를 통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단이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점을 꾸준히 역설했다. 1973년엔 “백미 편증 식이를 먹을 때 섭취 단백질의 아미노산 구성이 불균형된 식이를 섭취하게 되므로 영양실조가 매우 우려된다. 이러한 현상은 유소아 및 소아 등 성장기 어린이들의 경우 성장의 장해, 행동발달의 저조 등 그 영향이 매우 큼이 강조되고 있다.”라고 밝힌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한국인을 위한 식생활 지침이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식생활을 즐기자.”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당시 흰쌀밥에 고깃국이 최고인줄 알던 서민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쌀의 유통을 규제했다. 적극적으로 밀을 장려함과 동시에 쌀 소비를 억제한 것이다. 덕분에 상인들은 제 나름대로 꾀를 내기 시작했다. 설렁탕에 소면이 들어간 것이 이때부터다. 짜장면이나 밀떡볶이가 국민 음식이 된 것도 비슷한 시기로 보인다. 잔칫날 먹는 흰쌀밥에 고깃국은 짜장면에 탕수육으로 바뀌었다. 문화가 바뀌었다.
 
밀 자체는 도정된 쌀보다 영양성분이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통 밀로 만든 식품은 다른 반찬 없이 양념만으로 버무려 먹게 되기에 탄수화물을 과다 섭취할 가능성이 높인다. 쌀과 밀 두 개만 놓고 무엇이 좋은지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문제는 우리 생태계가 버틸 수 있는 지다. 쌀이나 밀이 아무리 좋다한들 키울 땅이 없으면 그만이다.
 
영양학의 문제가 아니다. 박정희 정부의 밀식 장려의 바탕에는 PL480(미국의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이 있다. 미국의 원조를 제공받은 국가가 원조액 가운데 일정액을 미국 잉여농산물 구매에 쓰도록 하고, 빈곤층 원조, 재해구제 원조, 학교급식에는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전시에 군인들이 소비하던 농산물이 전후에 남게 되자 이를 원조국에게 떠넘긴 셈이다.
 
떠넘겨 받은 밀을 처리하기 위해 정부는 영양학을 교묘히 이용해 국민들에게 일종의 사기를 쳤다. 가난하고 배고픈 서민들은 정부의 사기에 기꺼이 넘어갔다. 그 대가로 우리나라 농업이 쇠락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남아도는 쌀을 처리하기 위해 쌀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한편 밀 의존도는 더욱 높아져 밀 값 변동에 전체 물가가 들썩인다. 만들기에도 간편하고 값도 싸니 밀 음식을 팔지 않는 곳이 없다. 대학가 메뉴는 백반 메뉴 하나와 스파게티와 라면, 샌드위치 등의 밀 음식 30여개가 차지하고 있다.
 
박근혜가 구속됐다. 박근혜가 구속됐다 해서 내가 먹던 면식이 쌀밥으로 변하진 않는다. 아직 밥이 보약이라지만 나에겐 시간도, 돈도 없다. 음식뿐인가. 변하지 않을 것이 수없이 많다. 대통령이 바뀌면 뭐하나, 난 라면을 먹어야 한다.
 
송은하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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