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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독립영웅들)①사비 털어 독립자금 댄 '민족자본가' 정세권
조선물산장려회 살림 맡아 재정관리…'건양사' 설립해 국내 주거공간 지켜내기도
2019-02-28 12:00:00 2019-02-28 12:00:00
[뉴스토마토 홍연 기자] 3.1운동은 전민중적인 항일운동의 발인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의 진상도 전 세계에 드러냈다. <뉴스토마토>는 유명 독립운동가들 못지 않게 조선독립에 힘썼던 숨겨진 영웅인 '민족자본가'와 '외국인'을 재조명했다(편집자주).
 
정세권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위해 대규모 한옥집단지구를 개발해 주거지를 확보했다. 북촌뿐 아니라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해 대자본가로 성장했지만, 민족자본가로 민족 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번 돈으로 막대한 이권을 취하기보다 일제에 맞서 민족국가를 지키려 했다.
 
정세권의 가족사진. 아랫줄 첫째가 정세권이다. 사진/정세권의 막내딸 정남권 제공
 
정세권은 1928년 조선물산회 이사를 맡아 3년간 경상비와 기관지 발행 비용 등 재정의 상당 부분을 부담했다. 1930년부터는 전임상무로 조선물산장려회 사업 전반을 총괄했다. 1929~1930년까지 2년간 그가 부담한 금액은 확인된 것만 3670원으로, 물산장려회 운영비 60~75%에 해당한다. 당시 낙원동 3000번지의 토지 가격이 5000원이었던 걸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 물산장려 회관 건립에도 부지비 5000원과 건축공사비 1만5000원을 합쳐 총 2만원이 필요했는데, 기부금이 모이지 않아 그의 사비로 지었다. 1931년 9월 완공된 1층은 상품판매소, 2층은 상품진열소로 사용되면서 생산과 판매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재산강탈당해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한 정세권은 종로구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운영비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에도 재정 기부를 했다. 토지 매입비와 건설비 등을 포함해 회관 건설에는 당시 여공 200여명의 월급인 4000원이 투입됐다. 건물기증뿐 아니라 조선기념출판관 이사로 재직하며,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를 후원했다. 일제는 1930년대 중반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진했다. 1938년 '조선 교육령 개정령'으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고, 학교 안에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됐다. 조선어학회에는 3.1운동에 참가한 인사들과 반일 민족주의자 주시경의 제자 그룹 등이 다수 포함돼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홍원경찰서에 투옥돼 심한 고문을 당하고, 1943년에도 다시 경제사범으로 몰려 상당한 재산을 일제에 강탈당했다. 
 
서울 북촌 전망대에서 본 가회동 31번지 풍경. 작은 한옥들이 처마를 이어가며 어우러진 형태의 대형 개발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사진/홍연 기자
 
"일본인 북촌 진출 막아라"
 
정세권은 1919년 2만원을 들고 경성으로 상경했다. 그는 한옥집단지구를 경성 전역에 걸쳐 건설하면서 10년도 안 된 시기에 '건축왕'이 됐다. 일제는 1920년대 새로 유입된 일본인들의 주거지를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북촌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이 위협당할 당시 그는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해 북촌에 진입하면서 조선인을 위한 적정한 가격대의 편리한 집을 만들었다. 부유층을 위한 한옥집단지구도 건설했지만, 서민들을 위한 한옥도 건설해 그들이 월부로 집을 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본인이 건설한 한옥의 품질을 검수하기 위해 한옥집단지구 개발 뒤 온 가족이 이사해 일정 기간 거주했다.

서울시, 정세권 전시·아카데미 추진 
 
서울시에서는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오는 4월 9일부터 정세권에 대한 전시를 기획·운영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북촌 일대에 한옥단지를 조성하고 조선물산장려회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민족자본가'이자 '민족운동가'였던 그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한다는 것이다. 북촌 한옥청에서 열리는 전시와 함께 아카데미와 답사가 진행된다. 
 
1차 아카데미에서는 정세권 연구자인 서울시 관계자가 <정세권과 북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진행한다. 2차 아카데미에서는 박용규 고려대학교 교수가 <정세권과 민족운동>, 3차 아카데미에서는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와 정기황 한국문화도시연구소 소장이 <정세권과 도시형 한옥>을 주제로 강연한다. 
 
1930년대 정세권이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골목 풍경. 사진/홍연 기자
 
홍연 기자 hongyeon1224@etomato.com
 
참고: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김경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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