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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가는 것들, 연필로 그린 김훈
신작 산문 '연필로 쓰기'…일흔 넘어 보는 삶의 파편들
2019-04-05 06:00:00 2019-04-05 06: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그는 날마다 몽당연필을 쥐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필일신'을 칠판에 걸어두고 글을 썼다. 책상에는 지우개 가루가 산을 이뤘다가 빗자루에 쓸려나갔고, 무수한 파지들은 쌓였다가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그렇게 3년6개월, 200자 원고지 1156매가 세상에 나왔다.
 
소설가 김훈이 신작 산문 '연필로 쓰기'를 냈다. 그는 여전히 원고지에 육필로 글을 쓰는 우리 시대의 몇 남지 않은 작가다. 그에게 연필은 무기이며 밥벌이의 연장이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어느덧 70세에 접어든 그는 선연히 '보이는 것들'을 충실하게 받아 적기로 했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과거 기억에서 터져 나오는 슬픔과 분노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를 진정성 없는 눈물로 막으려 했던 '5.19 대루'와 폭염수당 100원을 요구하는 배달라이더에 대한 이 땅의 처우, 오함마를 들고 철거촌을 부수던 철거반원들과 이를 막으려 달려들던 엄마들에 대한 유년의 기억이 얽히고 설킨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대상을 묘파해 인간과 세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글 작법은 이번 책에서도 여전하다. 지난 산문집에서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던 그는 이번 책에선 똥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 보인다. 젊은 시절의 울분과 짜증으로 퍼 마시던 술과 다음날 아침 끓는 배에 대한 기억을 밥벌이의 문제로 연결 짓는다.
 
'지금 동해에서 해가 뜨는 매일 아침마다 이 나라의 수많은 청장년들이 변기에 앉아서 내 젊은 날의 아침처럼 슬픔과 분노의 똥을 누고 있다. 밥에서 똥에 이르는 길은 어둡고 험하다. ('밥과 똥', 43~45쪽)'
 
함께 얼굴 쭈그러진 친구들과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해마다 해가 간다'와 '늙기와 죽기', 하객들의 영 신통치 않은 반응에 주례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꼰대는 말한다'는 단단하고 허무한 김훈의 세계를 슬쩍 스쳐가는 농담들이다.
 
일흔을 넘은 그는 이제 '산신령'처럼 세계를 바라본다. 삶을 구성하는 파편들에 현미경을 들이밀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소중히 한다. 20년째 그가 산책하고 걸으며 쉬어가는 일산 호수공원 풍경을 그리며 가까운 것들을 더 가까이 두려 한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김훈 '연필로 쓰기'. 사진/문학동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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