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 감독 (사진제공=NEW)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기자는 개인적으로 영화 '방자전'을 좋아한다. 단순히 야한 영화인줄 알고 봤다가, 춘향(조여정 분)과 방자(김주혁 분), 몽룡(류승범 분)의 섬세한 심리묘사에 감탄했다. "시대적인 배경을 봤을 때 양반이 기생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상상에서 출발했다"는 영화를 만든 계기도 좋았다.
그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던 김대우 감독이 다시 '19금 멜로'인 '인간중독'을 들고 충무로를 찾았다. 월남전이 끝난 직후인 1969년이 배경이고, 조각 미남 송승헌의 옷을 벗겼다. 한국판 '색, 계'라는 등 개봉 전부터 센세이션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송승헌이 이제껏 보여준 연기력 때문이다. 습관이라고도 하고 클리셰라고도 하는 그의 연기. 중요한 순간에 매번 똑같은 표정과 말투의 대사는 그 인물에 앞서 송승헌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몰입도가 순간적으로 확 떨어진다. 여러번 경험했다.
하지만 '인간중독'에서 송승헌은 달랐다. 진중하고 무거운 이미지의 김진평을 연기한 송승헌은 기존의 클리셰가 보이지 않았다. 본인도 꽤나 만족스러운 듯 했다. 송승헌의 성장이 뚜렷하게 보인 작품이 '인간중독'이다.
새로운 송승헌을 만들어낸 장본인 김대우 감독을 지난 12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간중독'은 송승헌의 클리셰와의 전쟁이었죠"라고 말한 김 감독의 영화를 향한 신념과 철칙을 들어봤다.
◇웃고 있는 송승헌과 김대우 감독 (사진제공=NEW)
◇"송승헌은 조금도 나를 거역하지 않았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것에 대해 송승헌은 꽤나 만족스럽게 여기는 듯 보였다. 지난 7일 언론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송승헌은 여러차례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게 정말 잘 한 것 같다"는 말도 되풀이했다.
김대우 감독은 "본인도 경력이 기니까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며 "군인으로서의 새로운 모습과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감정 표현까지 송승헌의 연기는 굉장히 훌륭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저는 송승헌의 클리셰와의 전쟁이었죠"라고 덧붙였다.
송승헌의 클리셰를 빼기 위해 김 감독도 무던히 노력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 패턴을 모두 다 버리길 요구했다. 말투부터 몸짓 하나,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김 감독은 송승헌에게 "하지마"를 요구했다.
그리고 김 감독은 고마워했다. "정말 목숨을 다해서 찍었거든."
김 감독은 "송승헌은 나 하나만 믿고 덤벼들었다. 기존에 해오던 것을 내 요구로 다 바꿨다. 얼마나 불안했겠냐. 그저 나 하나만 믿고 나 하자는 대로 찍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었다"면서 "요만한 것도 나를 거역한 게 없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작은 배역에도 생명력을 불어넣을 줄 아는 김대우 감독 (사진제공=NEW)
◇"남자는 절대선인 여자를 찾지만 추구하지는 않아"
이번 작품에서도 김 감독의 장기는 그대로 발휘된다. 마음을 줄 듯 말듯 오묘한 신경전이 오고 가고, 끝내 감정을 폭발시키는 남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또 현실적인 문제로 여자는 남자를 멀리하고, 남자는 혼란에 빠진다. 남녀의 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이 2시간 안에 섬세하게 그려진다. 관객은 두 인물을 통해 설렘과 분노, 사랑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시나리오도 본인이 직접 썼다. 실제 만나본 김 감독은 정말 사람을 파악하는데 도가 튼 사람 같았다. 내면의 깊이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심리를 이리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해 김 감독은 "그런 것에 왕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배우랑 스태프를 좋아하는 게 그 방법인 것 같다"고 답했다.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을 더 많이 관찰하고 그들의 얘기를 듣고 진심을 아는 것이 심리묘사를 잘하는 비결이라는 의미다.
김 감독은 "이걸 7년 만에 깨달았다. 시나리오를 쓴지 7년 만에. '정사'를 쓸 때였다. 캐릭터를 사랑해야 되는구나. 이 캐릭터는 이미 내가 시나리오를 쓰기전에도 살아왔던 인물이고, 영화가 끝나도 살아가야하는 인물이다. 앞 뒤의 삶이 있다는 깨달음을 느꼈다. 너무 극적 방향에 따라 인물을 묘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을 묘사할 때 겸허해졌다고 해야할까. 정성스러워졌다고 해야할까. 그런 게 생겼다"고 말했다.
비록 글로만 표현된 사람인데도 생명체를 다루듯 정성을 쏟았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는 주인공 뿐 아니라 조연에게서도 살아있는 느낌이 전해진다.
그는 "개인적으로 가치관에 옳고 그름이 있다기 보다는 입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선과 악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입장차이가 더 우리 곁에 있지 않나"고 설명했다.
이는 수 년전 노희경 작가와 인터뷰를 할 때의 '워딩'과 일맥상통한다. 작은 배역까지에게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가들에게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나 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김대우 작가의 작품에는 절대적으로 착한 여자가 없다. '방자전'의 방자나 '인간중독'의 김진평이 절대선에 가까운데 반해 '조선남녀상열지사-스캔들'의 전도연이나 이미숙도 착하다고만 볼 수 없고, '방자전'의 조여정은 여우에 가깝다. 류현경도 속물적인 면이 강하다. '인간중독'에서 임지연이나 조여정, 전혜진 등 여러 인물들 역시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은 없다. 다소 이기적이거나 야망이 있다. 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무조건 착한 여자는 없다는 게 김 감독 작품을 관통하는 부분이다.
"궁극적으로는 남자가 절대적으로 선한 여자한테는 매력을 못 느낄 것 같다."
'오!' 감탄사가 나왔다. 맞는 말 같았다. 그리고 김 감독은 "남자가 절대선을 찾지만 추구하나?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확실히 사람을 잘 아는 감독이 분명하다.
◇김대우 감독 (사진제공=NEW)
◇"송승헌·임지연 자녀가 봐도 아름다울 베드신"
김 감독의 또 다른 장점은 베드신 연출이다. 리얼하게 묘사된다. 현실감이 탁월하다. 손짓, 몸짓 하나 하나가 정말로 둘이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는 이를 파격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파격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성인이 성인에게 보내는 영화인데, '19금'이라는 말도 어색하다.다들 나이가 몇인데. 15세를 두고 19금 영화를 만드는 게 파격이지. 이건 자연스럽고 평범한 영화다. 지극히 당연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는 임지연의 딸이 봐도 송승헌의 아들이 봐도 멋있고 아름다운 영화여야 한다"며 본인만의 원칙을 털어놨다.
말 잘하는 감독은 다르긴 다른 것 같다. "왜 찍었어"라는 말을 들으면 안된다고 한다. "이렇게 예뻤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영화에 나오는 게 이력에 어두운 부분이 되면 안 된다. 대표작이 되면 좋고, 못되더라도 부끄러운 영화는 되지 말자"는 게 그의 철칙이다.
카메라에 조금이라도 더 예쁘고 멋있게 나오기 위해 공들인 몸을 가족이 봐도 자랑스럽고 본인에게도 추억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 늙을 것인데, 쭈글쭈글 하게 변할 것인데, 그 이후에 다시 꺼내놓고 봤을 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 김 감독의 신념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현장을 상상해봤다. 어떻게 찍을까. 옷을 벗고 연기를 한다는 건 그 어떤 감정연기보다 어렵다고 하기에 쉽게 상상이 안갔다.
김 감독은 "촬영 직전에 내가 일일이 다 연기한다. 흔들고 움직이고, 스태프 중에는 깔깔 거리고 웃는다. 얼굴 빨개지고 땀은 뻘뻘 흘리고 나면, 배우나 스태프들이나 긴장을 하고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를 전했다. 많이 안 찍는다는 것.
그는 "최소한의 테이크를 간다. 그래야 배우들의 눈에서도 스파크가 나고 힘 한 방울 안 남기고 최선을 다한다. 그 움직임에서 엑기스가 나온다. 자신의 힘을 남겨두지 않는 연기에서 날 것이 나온다"고 말했다.
신념과 철칙을 지키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심도 있는 관찰, 촬영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김 감독의 '인간중독'은 역시 호평이 많다. 여자들은 임지연에 몰입하고, 남자들은 송승헌에 자신을 이입한다.
오랜만에 사람이 궁금해지는 영화가 김 감독의 손에서 나왔다. 따뜻한 햇살아래 봄바람이 선선히 부는 5월이다.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인간중독'을 선택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