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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해무', 여섯 뱃사람의 '집착'이 만들어낸 파국
입력 : 2014-08-04 오전 8:28:24
◇<해무> 스틸 (사진제공=NEW)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1997년 IMF는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에는 배금주의가 한층 만연하고, 사람들의 가치관도 크게 변화했다.
 
영화 <해무>에 등장하는 6명의 선원들은 IMF를 통해 충격을 겪은 뒤 급작스럽게 변한다. 광기 속에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한다. 거칠고 고생스러운 뱃일을 하면서 쌓인 유대감 따위는 없다.
 
영화는 이를 깊은 바다처럼 차갑게,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습한 바다가 배경이지만 영화의 감정선은 건조하고 메마르다.
 
영화는 지난 2001년 밀입국 시도를 하던 중국인들이 전원 사망한 제7호 태창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선원들은 어창에서 사망한 밀항자들을 바다에 던지려고 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극한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끝을 보여준다.
 
◇김윤석 (사진제공=NEW)
 
하루에 술집에서 200만원을 쓸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전진호 선장 철주(김윤석 분)는 만선은 커녕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신세로 전락한다. IMF가 진행되던 시기, 급기야 정부의 감척사업 대상자가 된다. 겨우 뱃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마누라는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났다. 집도 마누라도 의지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전진호 하나 뿐이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철주는 선원들과 함께 고기가 아닌 사람을 실어나르기 위해 출항을 결심한다.
 
망망대해 앞바다에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전진호는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모한다. IMF처럼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일순간 선장을 포함한 6명은 한 가지씩에 집착한다. 그 집착은 의심과 반목으로 이어지고, 결국 모두에게 파국을 안긴다.
 
배가 인생의 전부인 철주는 전진호에, 선장의 말을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갑판장 호영(김상호 분)은 철주의 명령에, 침착하고 잔정이 깊은 전진호의 정신적 지주 완호(문성근 분)는 혼령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기적인 성격의 경구(유승목 분)는 돈에, 창욱(이희준 분)은 섹스만을 좇는다. 전진호의 막내로 선한 품성을 가진 동식(박유천 분)은 눈이 맞은 밀항자 홍매(한예리 분)만 바라본다.
 
함께 밥을 나눠먹으며 식구처럼 지내던 이 여섯 명의 선원들의 유대관계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대화보다는 폭력이 앞서고, 고기를 잡을 때나 사용되던 식칼이 사람을 찌르는 흉기로 변모한다. '해무가 몰려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문구는 영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해무> 스틸 (사진제공=NEW)
 
이 영화는 극단 연우무대의 30주년 기념작 <해무>를 각색한 작품이다. 연극 극본을 원작으로 하다 보니 인간 내면의 본질을 파고든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나면 먹먹하고 여운이 깊다.
 
캐릭터 설명을 딱히 하지않고 본론으로 넘어가는 대목은 다소 불친절하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하다. 열린 결말은 욕망의 처연함을 설명한다.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속도감이 있다. 예상 밖의 유머 등 상업영화의 덕목을 적절히 갖추고 있다.
 
'인간 본능의 끝'을 설명하려던 심성보 감독은 조명을 통해서도 그 느낌을 주려한다. 해무가 낀 밤은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며 해가 쨍쨍나는 낮에도 묘한 서늘함이 전달된다. 맑고 화창한 느낌은 없다. 영화 내내 텅텅 빈 컴컴한 방을 바라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윤석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연극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했다. 박유천을 제외한 배우들이 극단 출신이다. 배우들간의 앙상블이 훌륭하다. 이러한 배우들을 만난 건 심 감독에게 있어 행운이다.
 
특히 선장 철주를 연기한 김윤석의 에너지는 무시무시하다. 감정 기복의 변화가 심한 철주 캐릭터를 맡은 그의 연기는 또 한 번의 찬사를 이끌어낸다. 전진호에 반항하는 밀항자를 바다에 집어던지라며 "여기서는 내가 대통령이고, 내가 판사여"라고 일갈하는 김윤석의 살기어린 눈빛은 스크린을 제압한다.
 
◇이희준 (사진제공=NEW)
 
김윤석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가 이희준이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만으로도 창욱의 욕구를 표현하는 연기는 이색적인 공포감을 조성한다. 묘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연극 배우의 차기 대권주자"라는 김윤석의 극찬을 끌어낸 연기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나선 문성근의 연기도 훌륭하다. 문성근은 <해무>에서 완호를 통해 몸에 힘을 뺀 연기로 인상을 남긴다. 스크린에서 더 오래 보고 싶은 배우다.
 
이 외에도 우직한 연기로 현실감을 준 김상호와 뱃사람 치고는 남다른 패션감각을 자랑하는 경구 역의 유승목, 북한여성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예리까지 하나같이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박유천-한예리 (사진제공=NEW)
 
아이돌 출신 박유천은 극단 출신의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펼친다. 감정의 폭이 큰 동식을 연기함에도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이 없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라면 저 상황에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도덕이나 윤리를 버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을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게하는 부분도 많다. 요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만큼 묵직하다. 출중한 감독과 배우들이 차린 만찬이다. 올 여름 4대 대작 중 가장 영화다운 영화다.
 
상영시간 111분. 개봉은 오는 13일.
 
함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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