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 (사진제공=NEW)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뱃일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외간 남자와 함께 있다. 분노하지만 때릴 힘도 없다. 억지로 빌린 돈뭉치를 식탁에 턱하고 던진다. 아내는 돈이 얼마인지 센다. 아내도 집도 그에겐 기댈 곳이 아니다. 육지로 왔는데도 잠은 배에서 청한다. 선장 철주(김윤석 분)에게 남은 것은 어선 전진호 뿐이다.
그는 전작에서 화투판의 거물이었고, 족발다리로 수 십명을 죽이기도 했다. '얌마 도완득'이라고 부르지만 잔정이 깊은 선생님이었다가, 화이라는 괴물을 키우기도 했다.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김윤석. 신작 <해무>에서는 100% 뱃사람이 됐다.
전진호를 사랑하고 자신을 따르는 선원들에게 일당을 더 챙겨주고 싶어하는 무뚝뚝한 선장 철주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냈다. '역시 김윤석'이라는 찬사가 나올 법한 연기를 펼친다.
그런 김윤석을 지난달 30일 삼청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나는 캐릭터에서 쑥 빠져나와. 오히려 독한 연기를 하면서 힐링이 된다니까"라며 껄껄 웃는 김윤석이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철주의 독한 맛이 서려있었다. 원체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인 탓일 수도 있다.
길게 질문을 늘어놔도 답이 짧았다. 평소에도 말수가 많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내가 나와서가 아니라, 올 여름에 19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꼭 이 영화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김윤석의 자신감을 접했다.
◇김윤석 (사진제공=NEW)
◇"연극에서 시작한 텍스트 분석..나의 큰 밑거름"
영화를 보고 대체적으로 호평이 나왔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 깊이 있는 영화라는 게 공통적인 평가다. 배우들의 연기가 최고였다는 평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어렵다는 얘기가 많았다.
김윤석은 "무겁고 어둡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과연 우리 영화가 무겁기만 할까라고 하면 아닌 것 같다. 무겁게 느끼는 건 우리의 삶 자체가 무겁게 다가와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짜 리얼하니까"라고 말했다.
<해무>는 고기가 아닌 사람을 실어나르려다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여섯 선원들의 광기와 변화가 담긴 영화다. "인간의 본능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해무가 오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는 광경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도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를 짧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하겠나"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살면서 뭔가 예기치 않게 닥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원치 않는 것이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그 광경을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에 압축해놓은 영화"라고 설명했다. "<해무>는 인간 삶의 축소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영화에서도 김윤석은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전진호를 지키기 위해 살기를 띠우는 그의 눈빛은 스크린을 제압한다. 해양경찰대의 얄궂은 윤제문을 협박하는 장면이나, 선상에서 반항하는 조선족을 제압하는 장면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진다. '살려달라'는 홍매(한예리 분)에게 가차없이 "내다 던져라"라고 명령하는 모습도 강렬하다.
무섭고 나쁜 짓은 골고루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행동에 공감이 간다. 악역처럼 보이지만 악역이라고 꼬집을 수 없다.
"내가 본 철주는 가정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키려는 사람이에요. 폭력도 행사하지 않고 예전 좋았던 세월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에요. 배도 다시 건지고 선원들에게 일당도 좀 많이 주고 싶고. 그런데 그게 잘 안되는 거죠. 그렇게 된 건 누구의 잘못인건가요. 인간이 죄냐? 시대가 죄인거냐?고 물어보고 싶죠. 도덕과 윤리를 내려놓고 생존만 놓고 보면 가장 이성적인 인물은 철주예요. 동식이가 미친놈이지. 반나절 잠깐 봤다고 인생을 올인하는 그게 정상은 아니죠."
자신의 캐릭터를 쭈욱 설명했다. 영화내에 다소 석연치 않았던 부분도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김윤석이었다. 작품에 대한 이해력과 분석력이 탁월해 보였다.
김윤석은 "연극으로 시작해서 그런 것 같다. 작품을 많이 하고, 텍스트에 대한 분석이 굉장히 중요한 게 연극이다. 그런 훈련이 돼왔던 것이 밑거름인 것 같다"면서도, 자신을 향한 칭찬에 다소 부끄러운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다.
아무리 친분이 깊어도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은 뒤 마음에 들어야 출연을 결정한다는 그. 대본에 대한 깊은 이해도에서 출발했기에, 김윤석의 작품이 완성도와 흥행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닐까.
◇김윤석 (사진제공=NEW)
◇"<해무>의 최대 장점은 앙상블"
이 영화는 극단 연우무대의 30주년 기념 작품인 <해무>를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해무> 배우들 대부분을 연극배우 출신으로 캐스팅했다. 그 앙상블이 제대로 힘을 받는다. 마치 연극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한 수준이다. 그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해무> 배우들 전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김윤석 역시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을 앙상블로 꼽았다. "배우들이죠." 목소리와 눈빛에는 강한 힘이 담겨있었다.
"이 영화는 철주와 동식(박유천 분)이의 작품이 아니에요. 다 하나 같이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있죠. 바다에서 같이 찍는데, 누구 하나 안 나오는 장면이 없으니까 계속 동고동락을 했죠. 연기력이 워낙 월등한 배우들이라서. 이런 작품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현장은 지옥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추억이 많아요. 그런게 작품에 녹아든 것 같아요."
간단하게 박유천과 이희준에 대해 평을 해달라고 했다. 먼저 박유천의 마인드를 높이 샀다. 김윤석은 "완전히 맨살을 다 드러내고 연기를 한 것 아니냐. 그런 용기는 칭찬해줄만 하다. 데뷔작에서 옷을 벗었다는 것 자체가 재능이 있다는 것"이라고 칭찬했다.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배우가 이희준이다. 섹스에 집착하는 창욱이라는 인물에 묘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영화내에서 유일하게 유머를 담당한다. 김윤석은 그런 이희준을 두고 '대권주자'라고 했다.
"우리가 가장 아끼는 배우가 희준이죠. 이렇게 얘기하면 좀 웃기지만, 차기 대권을 물려줄만한 굉장한 재능을 가진 배우죠. 이번에 연기 정말 인상적이에요."
무슨 질문이든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을 했다. 고민도 많이 하지 않았다. 툭 던지면 툭하고 받았다. 카리스마가 확실히 느껴지는 배우다. 그런 그도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있죠. 왜 없겠어요. 없다면 거짓말이지. 이것도 돈 넣고 돈 먹기인데, 투자한 것만큼 건져가야죠."
조금 놀라웠다. 소위 말해 타율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타짜> 이후 작품에서 저예산 영화인 <남쪽으로 튀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록이 좋다. 그렇기에 여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김윤석은 "흥행이 중요하긴 하지만 작품 정할 때 그런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19금 영화가 핸디캡이 있지 않나. 그렇다고 작품이 좋아도 안하면, 누가 19금 영화를 하겠나. 구애받지 않고 작품만 보고 결정한다"며 "타율이 좋기는 하지만, 그게 온전히 나 때문이겠나. 작품에 임했던 사람들이 잘했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 여전히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고개를 숙이는 그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해무>를 한마디로 정의해달라고 했다. 자신에게는 가혹하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또 다시 목에 힘을 준다. "이번 여름 네 작품 중 가장 영화다운 영화"라고 엄지를 들었다.
"지난해 찍었던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와 <해무>는 내 필모그래피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한 줄이에요. 꼭 보라고 말하고 싶어."
국내 영화계에서 흥행 3대장(송강호, 김윤석, 하정우)으로 불리는 그의 자신감이 강하게 섞인 영화가 <해무>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믿고 영화관을 찾는 게 어떨까. 아마도 후회는 하지 않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