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6일
“계속 집 밖에 고양이를 내놓을 시 반상회 차원에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음.”
집집마다 발송된 빌라 반상회보 끝엔 우리 집을 겨냥한 날 선 공지가 적혀있었다. 공지 밑에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여 놨다.
“고양이가 자동차를 긁어 흠집을 내고, 음식물 쓰레기를 뜯어 병균을 퍼뜨림.”
집 거실에서 빌라 공용 마당으로 통하는 유리문으로 우리 집 고양이 뚱이가 들락거리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다. 그간 뚱이를 마주친 아이들과 어른들이 ‘나비야, 야옹아’ 해주던 것을 보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 눈 밖에 난 것이다. ‘뚱이는 매일 발톱을 깎아주는데. 차를 긁으면 고양이 발톱이 부러졌을 텐데. 뚱이는 사료만 먹어서 음식물 쓰레기는 뒤지지 않는데.’ 속에서 여러 말들이 치밀었지만 일단 삼켰다.
당분간 뚱이를 밖에 내놓지 않기로 했다. 괜히 밖에 내놓았다가 뚱이가 받게 될 ‘특단의 조치’가 무서웠다. 어차피 뚱이는 집고양이니까 집에만 두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뚱이가 길고양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길고양이였으면 친절한 공지 따위 없이 바로 ‘조치’를 취했겠지. 뚱이를 살리려면 뚱이를 숨겨야 한다.
#2015년 12월 2일
뚱이가 집에 없다. 낮에 나간 뚱이가 새벽 4시가 넘은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이렇게 오래 나가 노는 일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길거리에서 고양이 하나쯤 죽어나가는 이유야 허다하다. 매끈한 아스팔트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래, 혹시 반상회에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건 아닐까? 역시 뚱이를 밖에 내놓는 게 아니었다. 고양이가 죽어나가는 이유 가운데 ‘그냥 싫어서’가 있다는 걸 깜빡했다. 반상회보를 받은 뒤 집집마다 편지를 돌려 양해를 구하고, 대다수 빌라 주민으로부터 “고양이를 밖에 내놔도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냥 고양이가 싫다.
뚱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오늘은 거실에 이불을 깔았다. 밖에선 비가 오기 시작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뚱이 왔다!”는 엄마의 외침을 듣고 깼다. 시간은 아침 7시. 비에 흠뻑 젖어 고단한 몰골이긴 하지만 다친 데 하나 없이 돌아왔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직 우리 동네에 고양이 죽이는 사람은 없구나. 좋은 사람들이야.’
고양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은 쉽다. 밥을 주거나 집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고양이를 죽이지만 않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2016년 3월 17일
“저기요, 길고양이 밥 주는 건 좋은데 왜 저희 집 앞에서 주세요?”
“여기 고양이가 살고 있어서 준 거에요.”
“아니 그니까, 주는 건 좋은데 왜 사람 사는 데다 주냐고요. 사람 사는 데 고양이 밥 주지 마세요.”
집 근처 다른 빌라 앞에서 고양이 밥을 주다가 기어코 한 소리 들었다. 밥을 주려 앉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료통을 챙겨 황급히 자리를 떴다.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걸 싫다고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는 건 좋은데 내 집, 내 가게 앞에는 주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그렇게 따지면 도시에선 길고양이에게 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분한 마음이 드는 순간 ‘자꾸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밥에 쥐약을 섞어버리겠다’고 위협하던 아줌마가 떠올랐다. 내가 싸우면 고양이가 죽을지도 모른다.
이제 어디에서 밥을 줘야 할까. 보이는 건 끝없이 늘어선 ‘내 집’과 ‘내 가게’ 뿐이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한참을 걸어도 ‘사람 살지 않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밤 12시, 사료통을 들고 한참을 서성이다 으슥한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부스럭거리며 사료를 꺼내자 매일 밥을 얻어먹던 길고양이 바둑이가 어디선가 ‘애앵’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캣맘과 길고양이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새벽 뒷골목이다. 바둑이는 ‘아드득 아드득’ 소리를 내며 급하게 사료를 삼킨다. 바둑이는 오늘도 살아있었다.
‘그래, 너 살아있구나.’
밥 먹는 모습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페이스북에서 ‘길고양이의 천국, 이스탄불’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공원 벤치에 앉은 사람들 주변에, 무릎 위에 길고양이들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담은 생소하고도 발랄한 사진이었다. 그 외에도 이스탄불 거리 곳곳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잠을 자는 고양이들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에 길고양이만큼 많이 보이던 것은 사람들이 챙겨놓은 사료통과 물통이었다. 고양이가 사람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곧이어 사람들 발소리만 듣고도 도망가는 한국의 길고양이들이 떠올랐다. 한국의 길고양이는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 병균을 옮긴다는 이유로, 개체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발정기 때마다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미움 받는다. TNR수술(Trap-Neuter-Return의 준말로 동물을 포획해 중성화수술을 한 후 다시 방생하는 방식의 개체수 관리 사업)을 받으면 개체수 조절이 가능하고 발정기 때 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양이가 질병을 옮기는 쥐의 천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줘도 길고양이는 혐오범죄의 표적이 된다. 어쩌면 ‘나는 고양이가 그냥 싫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한국의 길고양이는 언제까지 ‘싫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까? 우린 정말 함께 살 수 없는 걸까?
박예람 / 바람저널리스트(www.bara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