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페이스북 트윗터
(지속가능 바람)혐오의 온도
입력 : 2016-05-30 오전 6:00:00
얼마 전 인터넷상에 ‘이름으로 어떤 사건인지 맞혀보는 게임’이라는 포스트가 올라왔다. 첫 번째, ‘가방녀’사건. 가방을 든 여자가 어떤 사건을 저지른 일인가? 정답은 남자가 여자를 살해하고 가방 안에 시신을 넣은 사건이다. 두 번째, ‘대장내시경녀’ 사건은? 남자의사가 대장내시경을 받던 환자를 성추행한 사건이다. ‘트렁크녀’는 무엇일까. 남자가 여자를 살해하고 트렁크에 가둔 뒤 불을 지른 사건이다. 최근에 일어난 ‘캣맘’사건은 길고양이 밥 주는 사람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 고양이 밥 주던 여성이 벽돌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다.
 
헤드라인은 언제나 자극적인 제목을 추구해왔고 여성이 가해자든 피해자든 간에 당연히 ‘~녀’의 라벨을 붙여왔다. 이제는 ‘~녀’ 라는 제목만 보고는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다. 문제는 남성은 ‘굳이’ 드러나지 않는데 ‘여성’ 이라는 사실은 사건의 본질을 흐릴 정도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만취녀’, ‘클럽녀’ 등 성폭행 피해자를 향한 딱지는 ‘만취했으니까, 클럽에 갔으니까’라는 의미를 전달하며 가해자를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폭력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러한 네이밍에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대중은 (여성들조차도) 여성이 피해자인 것에 익숙하다. 댓글로 ‘저런 ㅉㅉ사형제도 부활시켜야지’, ‘남자 망신 다 시키네’ 하면 되는 일이고, 범죄자 한 명의 문제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여성이 강력 범죄 피해자의 80%를 차지하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은 것을 들춰내는 것은 싸움을 유발하는 요소이므로 자제하자. 어떤 미친 범죄자에게 잘못 걸린 운 없는 사람.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편하다. 중립은 굉장히 안락한 장소기에.
 
5월 17일 강남 서초구 번화가의 한 상가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칼에 2~4차례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헤드라인은 ‘강남 화장실녀’. 허망하게 망자가 된 여성에 대해서는 ‘화장실녀’라는 것 이외에는 말해주는 이가 없는데, 언론이 나서서 범죄자의 동기와 그의 꿈을 말해준다. 여성에게 무시당했단다. 하지만 아마도 그를 무시한 것은 사회 그 자체고 하상욱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에게 ‘까지’ 무시당한 것이 그의 분노가 촉발된 계기였을 것이다. 그는 남녀 공용 화장실 안에 몸을 구기고 앉아 남자가 6번 드나드는 동안 여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유는 뻔하다. 어린 여자는 반항해봐야 자기 몸에 생채기 조금 내는 게 전부니까. 생채기나 낼 수 있으려나.
 
여성 살해에 분노한 사람들이 이 사건을 ‘여성 혐오’로 일어난 살인이라 규정했을 때, 상당수의 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지금까지의 사건과 별 다르지 않은 ‘묻지마 살인’에 왜 이렇게 유난이냐는 것이 그들 주장의 주요 골자다. 그저 평화롭게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다, 망자를 가지고 특정 주장에 힘을 보태는 것이 할 짓이냐, 등등. 그들이 취하는 태도는 평화롭고,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공평한 처사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건 하나로 이토록 극명한 온도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평범한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 위협은 대부분 여성에게 한정된다. 누군가에게는 ‘의심당해서 기분나빠’ 정도의 감정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화장실에서 몰카만 찍히는 줄 알았는데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수 백 수 천 명의 선량한 남성들 사이에, ‘재수 없게도’ 1명의 범죄자가 섞여 들어가 있는 경우, 피해자의 타겟은 똑같이 재수 없게도 대부분 성별로 이미 한번 걸러진다.
 
즉 여성은 공용화장실 문 너머든 내 등 뒤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일부’에서 내 놓은 답은 ‘남자를 일반화하지 마세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남았다. 17일에 강남역 노래방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죽지 않았다. 피해자와 다른 여성들이 다른 점이라곤 17일에 있었던 장소밖에 없었다.
 
내가 ‘OO’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상 속에서 갑자기 살해될 수 있다면, ‘OO'이라는 그 속성은 사회에서 차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온갖 이유를 대며 합리화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더욱이 말이다. 미지근한 온도도 분명한 혐오다. 눈을 감고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강자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자신이 중립이라 말하는 여성 혐오자들이 무섭다. 미지근한 사회 또한 무섭다. 당신들의 침묵과 동조, 혐오와 진배없는 무관심함이 지금 이 순간에도 희생자를 만들고 있으니.
 
윤유진 바람저널리스트(www.baram.news)
손정협 기자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