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빌라 입구엔 빌라 이름이 적힌 탑이 있다. 몇 해 전 누군가 탑의 기둥 한쪽 면에 커다란 태극기를 그려 넣었다. 누가 거기에 태극기를 그렸는지도 모르겠고, 왜 거기에 태극기가 있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태극기를 그린 사람이 “태극기 그림을 문제 삼는 사람은 모두 종북”이라고 일갈했고, 이후 누구도 그 태극기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추측컨대 태극기를 그려 넣은 사람은 자신이 그린 태극기를 보며 가슴 벅찬 애국심을 느꼈을 테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애국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위대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라 여겼을 테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말도 없이 태극기를 그려 넣은 그의 행동 자체가 비민주적이었으며, 자신이 저지른 비민주적 처사를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뭉개는 모습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였다. 이후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모종의 폭력성을 함께 느끼게 됐다.
자신이 태극기를 보며 느꼈을 벅차오르는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껴야 한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종북이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야말로 북한과 닮아있었다. 그가 강요하는 애국심도 전체주의적이라는 측면에서 북한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국가는 결국 이념이며, 사회 질서를 파악 가능한 무엇이자 통제 모델로 상상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의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강요하는 사회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억압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와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애국심은 지난 수십 년 온 나라에서 목도되어 왔다.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생존자 방한, 세월호 집회, 한·일 협상 무효 집회 등 정부와 국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는 항상 애국이라는 이름과 군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함께 나타났다. 이 애국지사들은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비난했다. 자신들과 같은 ‘애국’을 하지 않는다면 종북이라는 말에서 유추컨대, 이들의 “애국하라”는 말은 “닥쳐!”와 동의어인 듯하다.
국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 저마다 다른 애국심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전체주의를 모면할 수 있다. 애국심이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아닌 나와 구성원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라면, 애국심은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될 수 있다. 애국심은 국가의 잔악한 범죄에 반대할 수도, 국가의 위선을 폭로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