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한 기업지배구조는 국내 기업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꼽힌다. 기업지배구조는 기업 경영 통제에 관한 시스템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기업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주주·경영진·근로자 등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규율하는 제도적 장치와 운영기구를 말한다. 기업지배구조 평가는 기업 소유구조, 주주의 권리, 이해관계자의 역할, 투명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뤄진다. 특정 주주의 권익이 과대대표되거나,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역할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지 않는 경우, 경영 상의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한 경우 기업지배구조가 취약하다고 평가한다.
국내 상장법인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한국거래소에서는 3월 10일부터 ‘Comply or Explain’ 방식의 기업지배구조 공시제도를 도입했다. Comply or Explain은 회사가 자율공시 방식으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 준수(Comply)여부를 밝히고 준수하지 못한 경우 그 이유를 설명(Explain)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회사가 알맞은 지배구조를 선택하도록 재량권을 주는 동시에 선택한 지배구조와 모범규준과의 차이를 공시하도록 해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해서는 대내외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지난해 아시아 기업지배구조협회(ACGA)는 우리나라의 지배구조 순위를 아시아 11개국 중 8위로 평가했다. 말레이시아(6위), 인도(7위)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2년 칼럼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주가가 비슷한 수준의 외국기업의 주가에 비해 낮게 형성(코리아 디스카운트)되는 이유로 ‘미흡한 지배구조’를 꼽았다. 오너 일가의 편법적 경영권 승계, 상속세 탈루, 일감 몰아주기 등 비도덕적 지배구조가 주주이익을 훼손하고 증시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분석이었다.
금융당국 중심으로 지배구조 개선 논의 ‘활발’
기업지배구조 개선 논의는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를 보다 건전하게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돼왔다. 2016년 8월 시행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지배구조법)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지배구조법은 금융회사 소유구조의 투명성과 내부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지배구조법은 은행법,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보험업법 등 금융업권별로 차이가 있던 지배구조에 관한 기준을 통일하여 체계적으로 규정해 금융업간의 형평성을 제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재인 정부 들어 급물살을 탄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가 참여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법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집안일을 맡아 보는 집사(Steward)처럼 기관 투자자들이 고객의 재산을 선량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다는 뜻에서 나온 용어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주요 기관들이 기업의 의사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주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국민과 고객에게 이를 투명하게 보고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경우 기관은 돈을 맡긴 고객을 대신해 기업 경영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거래소, 3월 10일부터 CoE 방식 기업지배구조 공시제도 도입
한국거래소가 지난 3월 10일 도입한 Comply or Explain 방식의 기업지배구조 공시제도는 상장법인이 거래소가 선정한 기업지배구조 관련 핵심 원칙 10개에 대해 준수여부를 밝히고, 미준수시 사유를 투자자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Comply or Explain 원칙은 회사가 자신에게 알맞은 지배구조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서 해당 지배구조와 모범규준과의 차이를 공시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만약 법규제를 통해 모범규준을 준수하도록 강제하게 되면, 기업의 반발이 클 뿐 아니라 감시·제재를 위해 들어가는 행정 비용도 상당하다. Comply or Explain은 기업의 자발적인 준수를 유도하여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높은 수준의 지배구조를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원칙을 도입, 운영하는 영국과 독일의 경우 상장기업의 상당수가 모범규준 준수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영국은 2010년 모범기준이 발효된지 1년후인 2011년 발표된 자료에서 FTSE350에 속하는 기업 중 50%에 해당하는 기업이 모범기준을 100%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나머지 기업 중 80% 정도가 모범기준의 조문 중 한 두 가지 정도의 조항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준수하는 것으로 드러나 그 효과를 입증했다.
국내에도 기업지배구조와 관련된 모범규준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규범력을 갖는 구체적인 원칙이 제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9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을 제정, 주요 공시 사항이 모범규준과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경우 그 이유를 사업보고서에 공시토록 권고했다. 또한 한국거래소(당시 증권거래소)는 상장법인이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도록 유도하고, 투자자 등 정보수요자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2003년에 상장법인 자사 홈페이지에 지배구조에 관한 정보를 공시하도록 권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모범규준에서 열거하고 있는 주요 공시사항이 추상적일 뿐 아니라 Comply or Explain 원칙 적용을 고려하지 않고 제정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핵심원칙 제정이 필요했다.
핵심원칙 10가지, 주주·이사회·감사기구 등 내용 포함
이번에 도입된 공시제도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가 공시를 통해 주주의 권리, 이사회 기능, 내부 감사기구 등 핵심 원칙 10개 항목의 준수여부를 자율적으로 설명하도록 했다. 핵심원칙은 기존의 모범규준과 함께 상법상 지배구조 관련 사항을 구체화하고 보완한 것이다. 투자자들에게 투자정보로서 가치가 있는 내용을 위주로 선별한 점과, 공시부담을 감안하여 종류를 최소화한 것이 눈에 띈다. 핵심원칙은 주주, 이사회, 내부 감사기구 분야에서 ①주주의 권리 ②주주의 공평한 대우 ③이사회 기능 ④이사회 구성 및 이사 선임 ⑤사외이사 ⑥이사회 운영 ⑦이사회 내 위원회 ⑧평가 및 보상 ⑨내부감사기구 ⑩외부감사인 등으로 구체화된다.
예를 들어 ‘핵심원칙 ①’에 해당하는 ‘주주의 권리’에서는 주주가 권리행사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시의적절하게 제공받고, 적절한 절차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가 주요 공시 내용이 된다. 회사는 주주총회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주주의 제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이행하고 있는지, 주주의 의결권 행사가 용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고서에 포함시켜야 한다. 미준수 사항이 있을 경우, 이를테면 주주 전자투표제를 아직 도입하지 않았다면 왜 도입하지 않았으며 향후 도입 계획이 있는지, 도입하지 않겠다면 대안은 있는지 등을 설명해야 한다.
회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거래소 전자공시시스템(KIND)을 통해 공시한다. 이는 자산총액 규모 등과 관계없이 전체상장기업에 적용되며 연 1회 사업보고서 제출 이후 2개월 이내에 제출이 원칙이다. 단 공시부담을 감안해 2017년 최초 제출은 6개월로 연장된다. 공시가 이뤄지면 거래소는 공시내용 모니터링을 수행한다. 지배구조 보고서의 근거사실이 확인되지 않거나, 투자 판단에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 거래소는 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 자율공시가 원칙이므로 공시 미이행에 대해서 별도의 제재는 없으나, 공시내용 중 허위사실이 확인될 경우에는 제재조치가 가능하다.
공시 미이행 시 강제력 없어…인센티브 제공 등 적극적인 유도 정책 필요
Comply or Explain 방식의 공시제도는 자율공시가 원칙이기 때문에 회사가 지배구조 공시를 하지 않더라도 거래소 측에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따라서 거래소는 지배구조 공시에 어려움이 없도록 지원하고 공시한 기업에 대해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유도책을 펼 필요가 있다. 이에 거래소는 기존 공시우수법인을 선정하던 절차를 참고, 18년 3월부터는 ‘지배구조 공시우수법인’을 특정해서 포상하기로 했다. 또한 지배구조 공시를 성실히 수행할 시 불성실공시 지정을 유예해주거나, 상장수수료를 면제해주는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거래소 차원의 혜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며 “대외 협력을 통해 감독기관이나 행정기관 차원의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또한 “규모가 작은 기업의 경우 초기에는 공시부담이 클 수 있다”며 “여력이 있는 대규모 상장회사에 공시를 권고해 선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자들이 새로운 공시제도에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회사가 지배구조 공시를 하더라도 이를 투자 정보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제도의 취지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정 선임연구위원은 “궁극적으로는 기업지배구조 공시가 투자수익율에 영향을 주는 것이 핵심”이라며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이 사회책임 투자의 일환으로 기업지배구조 공시를 참고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새 정부가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며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이어간다면 Comply or Explain 제도도 점차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기업의 고질적 약점으로 꼽히는 지배구조 취약성 문제가 문재인 정부에서 개선될지 주목된다. 사진/뉴시스
조응형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