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한 달을 맞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 모토는 ‘적폐청산’과 ‘개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 위원회 설치, 국정 교과서 폐지, 검찰 ‘돈봉투 만찬’ 사건 감찰, 국가인권위 위상 강화 등 취임 뒤 내린 업무지시를 통해 두 가지 국정 모토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였다. 문 대통령의 과감한 행보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고,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측면에서 여론은 우호적이었다. 한국갤럽이 9일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 수행평가 결과에서 긍정평가가 82%에 달했다.
지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문재인 정부의 사회책임 정책과제 토론회’가 더불어민주당 사회책임제도 특별위원회와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 주최로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새 정부의 사회책임 정책방향을 제언하고 이를 공론화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마련됐다. 적폐청산과 개혁의 핵심내용 중에 ‘사회책임’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는 안치용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이 제1주제로 ‘사회책임라운드의 도래와 새 정부의 사회책임 정책 방향 제언’을, 황상규 한국사회책임협동조합 이사가 제2주제로 ‘새 정부의 사회책임 정책 방향과 과제’를 각각 발제했다. 이어 강충호 한국사회책임협동조합 이사장의 진행으로 김종열 리딩경영연구소 대표,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김용구 기업과인권연구소 준비위원장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 ▲사회책임투자 ▲사회적 책임 증진을 위한 정부의 역할 등의 주제로 지정토론을 벌였다.
특히 정부·기업 뿐 아니라 노동조합 교육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사회책임 정책이 입안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김영호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대표는 인사말에서 “특정인에 책임을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민적 의무를 다 할 수 있는 ‘시티즌 오블리주’가 필요하다”며 “대통령 혹은 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의식이 고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표는 “새 정부에서 사회책임혁명이 이루어지는 기폭제가 오늘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사회책임 라운드’ 도래와 우리 정부의 정책 방향
안치용 집행위원장은 “기존의 경제 라운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나 환경 라운드 ‘그린 라운드’를 이을 국제적 흐름인 ‘사회책임 라운드’에 대비해야 한다”며 사회책임 라운드가 다가오는 징후로 ▲EU의 종업원 500인 이상 기업의 사회보고 의무화 정책 ▲사회책임에 관한 국제 가이드라인인 ISO26000을 자율지침에서 경영인증으로 변경키로 한 국제표준화기구(ISO) 이사회의 방침 ▲‘스튜어드십 코드’의 국제적 확산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 확산 ▲사회보고에 관한 국제적 기준을 제정하는 GRI가 가이드라인을 스탠다드로 전환키로 한 것 등을 꼽았다. EU는 2014년 11월 종업원 500인 이상 기업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뼈대로 한 비재무 및 다양성에 관한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결정했다. 종업원 수가 500인이 넘으면 상장 여부와 관계없이 비재무 정보를 공시하도록 했으며 내용은 환경·사회·고용은 물론 인권·반부패·뇌물 등에 관해서도 기술하도록 했다. 2017년은 이 결정에 따라 해당 기업들이 사회보고를 발간해야 하는 첫해다.
ISO26000의 경영인증화도 사회책임 라운드의 징후다. 지난 2010년에 제정된 ISO26000은 인증을 목표로 하는 경영시스템표준이 아니고 자율준수 지침표준으로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책임을 경영시스템에 통합하거나 인증에 이용하는 사례가 확산되자 ISO 차원에서 그에 대한 명확한 지침(IWA26)을 개발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ISO26000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율준수 지침에서 조만간 어느 정도 강제성이 따라붙는 준 표준으로 변경된다.
국제무역에서 트럼프 당선 이후 강화하는 보호무역주의가 ‘하드 장벽’이라면 사회책임 라운드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소프트 장벽’이다. 신성장동력 발굴 부진, 취약한 기업지배구조 등 산업 자체의 리스크에 더해 ‘하드’하고 ‘소프트’한 무역장벽이 중첩되면서 수출 주도형 우리 경제의 앞날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안 위원장의 진단이다. ‘사회책임 시대’에 적응하고 변화할 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는 “정부가 국가 차원의 구체적인 사회책임 전략을 수립할 것과 기업은 내실 있는 책임경영체계, 사회보고체계를 구축할 것”을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이 같은 시급한 과제의 선정과 실천은 물론, 사회책임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장기적인 로드맵을 포괄하여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무엇보다 기업·국회·정부·시민사회·학계가 참여하는 ‘사회책임 원탁회의’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16개 주요 분야별 사회적 책임 재확인
황상규 이사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한 순간에 우리 사회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아니다”며 “정부·기업 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사회적 책임이 공론화하여야 국가의 체질과 역량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황 교육원장은 우리 사회의 16개 주요 분야별 사회적 책임을 ‘너와 나의 사회적 책임’으로 제시하고,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분야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공약과 사회책임 이론을 연결, 새 정부의 사회책임 정책 과제를 확인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의 10대 공약은 사회책임과 연결할 부분이 많이 보인다”며 “제시된 공약에 사회책임이라는 가치와 방법론을 접목하면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접근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진 지정토론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USR) ▲사회책임투자(SRI) ▲사회적 책임 증진을 위한 정부의 역할 등의 주제로 진행되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 문재인 정부가 기업들이 ISO26000을 적극 활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종열 리딩경영연구소 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부패 청산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했는데, 수치화한 목표를 제시하지는 않았다”며 “부패인식지수(CPI) 60점대 진입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매년 발표하는 CPI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10년 동안 100점 만점에 50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201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53점으로 르완다(51위)에 이어 세계 52위다. 김 대표는 “정부가 부패인식지수 60점대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에 ISO26000 지침 활용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며, 그 방법으로 ▲ISO26000에 기반한 사회적 책임 평가와 인센티브 제도 개발 ▲사회책임 교육 및 관리 시스템 구축 등을 꼽았다. 또한 “우리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더 이상 규제라고 인식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전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ISO26000을 기업의 경영전략으로 받아들이고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기업·정규직·기업별 노조 중심 노동조합운동 탈피해야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됐다. 정승국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온 주제”라며 “ISO26000이 기업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직에게 적용된 표준인 만큼,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향상에 배타적인 관심을 기울여온 것에 반해 유럽은 노동조합이 연대적 임금정책 등을 제시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데 기여하면서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유럽의 노동조합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조직으로 인정받는 배경이 된다.
정 교수는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정규직 기업별 노조 중심”이라며 “노조의 사회적 책임론은 노동조합운동의 의제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조의 사회책임 담론이 논의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보다 광범위한 인식과 실천이 필요하다”며 “특히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 이론 정립과 모델 설정 및 매뉴얼 공급을 위해 상급노조의 역할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공적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활성화와 관련, 이종오 한국사회투자책임포럼 사무국장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 중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부분을 지목하며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사회책임투자를 확대하면 환경·소비자 권익보호·근로자 권익보호와 같은 사회적 가치가 기업 경영활동에 반영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공적연기금은 2017년 기준 총 67개다. 이중 사회책임투자 방식으로 기금의 일부를 운용하는 공적연기금은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세 곳이다. 하지만 전체 기금운용 대비 사회책임투자 비중이 국민연금 1.14%, 사학연금 1.52%, 공무원연금 0.61%로 매우 미약한 수준이라 공적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 사무국장은 “국가재정법의 의결권 행사 원칙을 ESG를 고려한 주주권 행사의 원칙으로 개정해 공적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를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공적 연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에 관해서도 논의가 진행됐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주요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지침이다. 국민연금이 지난 5월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과 관련한 용역을 발주한 바 있어, 올해 안에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이 기대된다. 이 사무국장은 “국민연금 가입 전후로 다른 연기금, 공제회, 자산운용사들의 가입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며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등의 위탁운용사 선정 시 코드 가입 여부와 수준을 고려해 가산점을 부여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책임 증진을 위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김용구 기업과인권연구소 준비위원장은 “사회적 책임 관련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상설 전담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준비위원장은 “국가와 정부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적 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까지 포괄한다”며 “정부가 공·사 영역, 정치·경제·사회·환경·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사회적 책임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정책 의지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국가차원에서 사회적 책임 관련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려면 컨트롤 타워가 되는 전담기구가 대통령 직속이나 총리실 산하에 설치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현재 「지속가능발전기본법」 상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환경부에서,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의 ‘녹색성장위원회’는 총리실에서 담당하고 있다. 독일은 CSR포럼을 연방노동부 산하에 두고 노조·학계·기업 등 전문가들이 국가차원의 사회책임 전략개발과 관련해 자문을 제공하도록 했다. 김 준비위원장은 “상설 전담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은 국가정책의 수직적·수평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사회책임제도 특별위원회와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 주최로 열린 ‘문재인 정부의 사회책임 정책과제 토론회’에서 김영호 KSRN 대표(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한국사회적경제신문
조응형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