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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지속가능사회와 그 적들
입력 : 2017-08-28 오전 8:00:00
지속가능성, 지속가능발전이란 말이 전세계적으로 회자된 지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7년 당시 UN 세계환경개발위원회 의장 할렘 브룬틀란은 지속가능발전을 “미래세대가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발전(수준)”이라 정의하면서 이후 우리가 살고 있고, 날마다 향유하고 있는 사회, 환경, 경제력, 거버넌스를 돌아보게 하였다. 2017년의 세계는 문명테러, 신보호무역, 신냉전, 신양극화라는 형태상 그다지 새롭진 않지만 내용상 질적으로 달라진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구환경적, 문명적, 경제적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 시기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지속불(不)가능성이 그렇게 새롭지만은 않다. 인류는 매년마다 약 7500만명씩 늘어가면서 2020년대 80억명을 바라보고 있고 이에 따라 지구위험한계선(Planetary Boundaries)은 날로 가까워지고 있다. 전세계 75억명의 사람과 200여 국가가 경쟁적으로 자원채취와 개발을 통해 매년 경제발전을 추구하며 연평균 2~3%씩 성장하면서 세계총생산량(Gross World Product)은 약 90조달러에 이르고 있다.
 
인류에 의해 만들어진 이전에 없었던 시대를 뜻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종점이 그다지 먼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이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세계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구체적 목표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면 17가지 주목표와 169개의 세부목표로 나누어져 있는데, 크게 보면 기본적 삶의 수준 보장, 안정적인 경제성장, 환경과 생태계 보존, 좋은 거버넌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카테고리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먼저 기본적 삶의 수준 보장은 빈곤종결, 기아해소와 농업발전을 통한 식량안보, 건강보장과 복지증진, 교육과 평생학습, 양성평등과 여성역량 강화, 물과 위생의 보장, 적정가격의 에너지 등의 목표를 담고 있다. 모두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이 필요함을 천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안정적 경제성장은 양질의 일자리와 고용보장이 가능한 경제성장, SOC 구축 및 산업화, 국가내·국가간 불평등 해소, 안전한 도시와 거주환경, 지속가능한 소비와 생산패턴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 번째 환경과 생태계 보존에서는 기후변화 대처, 해양자원 보존, 육지생태계 보존과 생물다양성 유지 등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좋은 거버넌스의 내용을 보면 평등하고 포괄적인 사법·행정제도 확립, 기업, 국가, 의회의 상호 글로벌 파트너십 활성화를 목표로 담고 있다. 각각의 목표를 더욱 세분화한 169개의 세부목표는 여기서 제시한 목표에 대한 구체적 달성기준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지속가능발전은 인류가 달성해야할 염원을 담은 규범의 총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와 환경, 세계에 대한 인식의 관점을 제시한 프레임워크, 새로운 세계관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먼 미래나 달성여부와 관계없는 관념적 목표가 아닌 현실의 모습이고 즉각적으로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속가능성, 지속가능발전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포괄하는 여러 가지 개념과 제도, 사회?경제적 흐름들은 모두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들이다. 다양한 관점과 인식, 구체적 방법론을 담은 토론과 논쟁은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가 당면한 지구환경·사회통합·거버넌스의 한계와 문제점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몰이해 또는 인류공동체에 대한 도전이라고 이해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고 지속해야할 지속가능성, 지속가능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는 것이 매순간 지구한계선에 근접하는 우리에게 급선무일 것이다. 첫째는 인식의 박제화이다. 제도적 동형화(institutional isomorphism)란 말이 있다. 일련의 개념, 사실, 현상을 제도가 단지 하나의 개념적 틀에 집어넣어 규정하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란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이 유독 우리나라에 와서는 하나의 개념으로 단순화되어 있는 듯하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환경과 생태계 보존”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기업에게 있어서는 사회적책임(CSR)로 이어져야 하는데 “지속가능보고서”와 동의어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도 대기업의 일이지 그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차원의 일로 간주되고 있다. 학교에서는 환경, 특히 근래 들어서는 원자력발전, 미세먼지, 조금 더 나아가 기후변화 등으로 교육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경제력의 유지와 발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식의 수준이 이정도이니 행동이 따라갈 리가 만무하다. 대한민국이 글로벌 사회의 변방으로 남지 않으려면 인식수준의 변화부터 시급하다.
 
둘째 분절적 사고이다. 지속가능성, 지속가능발전이란 지구환경, 사회통합, 경제발전, 거버넌스의 통합적 구조이다. 여기서 어느 한 부분만 떼어내어 실천하는 것은 돌연변이, 기형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모든 부문을 통합적, 총괄적으로 조정하고 추진해야할 것이고, 각 주체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목표달성에 매진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영역의 목표달성으로 지속가능성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셋째 집단극화(Polarization)이다. 사회통합이 그토록 강조되고 누구나 중요성을 열변하고 있지만 항상 진행형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고도화되며 사회적 연결관계, 거버넌스는 다층화되고 긴밀히 연결되어가는데도 특정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은 더욱 극단적 모습을 보이고 그들만의 코드와 방식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백인우월주의, 종교적 테러집단 등 글로벌 사회의 문제라 생각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수구집단, 부유집단, 권력집단, 특정이익 공동체 등의 비타협적 자세와 이들의 반공동체적 행동이 국가적 지속가능성을 저해하고 있다.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넘어 민주주의의 위기상황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기사회생하였지만 아직도 우리가 가야할 길이 멀다. 이제는 정부와 재계, 정치권만 바라보며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재래의 방식으로는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문제에 대응하기 어렵다. 각 주체에게 걸맞는 사회적 책임의 완수를 통해 해법을 찾을 때 지속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된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지속가능성의 적들을 향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할 때이다.
 
이화진 지속가능경영재단 상임이사 cecil70.lee@gmail.com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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