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내 종업원 수 500명 이상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 공시 의무화가 올해부터 적용된다. 이에 따라 지난해 기업 활동 결과를 기준으로 한 보고서가 잇따라 발간될 예정이다. 2014년 4월 EU 의회가 대기업의 환경, 인권, 반부패 등에 관한 ‘비재무 정보공개’를 의무화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2017 회계연도부터로 규정하였기에 올해 최초 의무화한 사회보고가 나오게 된다. 비재무적 성과에는 환경, 사회,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한 ‘비재무 정보’는 물론 인권, 반부패, 뇌물 등 ‘다양성’에 관한 정보가 포함된다. 의무화 해당 기업 중 비재무 정보공개를 이행하지 못하는 기업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원칙준수 예외설명(Comply or Explain)’방식이 적용됐다. 비재무 성과 공시 의무화는 유럽 지역의 대기업 약 6000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U의 사회보고 강화 정책은 한국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유럽에 진출한 우리 기업 중 현대자동차, 삼성전자와 같이 회원국 내 대규모 생산공장을 보유한 기업도 적용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에 진출한 기업 혹은 수출만 하는 기업도 유럽 기업에 준하는 비재무 정보 공시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제도시행에 따른 영향이 가시화하고 있지만 이 같은 변화에 한국 기업들이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속가능보고서를 정해진 양식이나 규정 없이 자율적으로 작성하는 한국 기업들이 EU가 요구하는 수준의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겠냐는 우려다. 현재 한국 기업들은 보편적으로 재무 지표 위주의 사업보고서만 공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비재무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만 제한적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온실가스·에너지 목표관리제, 배출권거래제에 포함된 국내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하는 정보는 온실가스 배출량, 에너지 사용량, 녹색기술 인증사항과 같은 일부 환경 정보에 국한된다. 다양한 ESG(환경·사회·거버넌스) 정보를 포괄하지 못한다. 이외의 비재무적 정보의 공시는 기업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
국제사회에선 비재무 지표 공개, 선택 아닌 당위
국제사회는 이미 한국을 앞서가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09년 세계 최초로 기업의 통합보고 제도를 도입했다. 통합보고는 장기적 가치창출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재무·비재무적 요인을 통합하여 보고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환경의 불확실성 증대, 급격한 기술 발전 동향을 반영하여 기업의 장기가치 평가에 부합된다고 평가받는 형식이다. 남아공 역시 기업이 보고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홍콩 증시는 2012년 상장기업의 비재무적 정보 공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비재무 지표를 권장사항으로 도입했고, 2015년부터는 의무사항으로 요건을 강화했다.
인도는 지난해 4월 시행된 기업법에 따라 인도에서 경영하는 기업에게 3년 평균 순이익의 최소 2%를 CSR활동에 의무 지출하도록 강제했다. 또한 각 기업은 사내 CSR위원회를 만들어 정책을 구성하고 인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기업이 사회책임 활동을 위한 예산을 따로 배분하고 자체 정책을 제정하도록 정부가 직접 강제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와 미국 증권거래소도 각각 ESG 성과 보고와 지배구조 공개를 강화했다. 이러한 추세는 수치로도 확인 가능한데, 최근 3년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는 글로벌 기업이 약 39% 증가했다. 국제사회에선 사회책임과 같은 비재무지표 공시가 제도적으로 정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종오 국장은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을 '투명화'와 '제도화'로 요약했다.
이 국장은 “PRI와 MSCI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 규모 상위 50개국의 책임투자와 관련한 제도와 정책을 분석한 결과, 연기금의 ESG 고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기업의 ESG 정보공개라는 세 가지로 크게 그룹핑 되는데, 이러한 규제의 절반 이상이 2013년부터 2016년에 만들어 졌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기업 경영의 투명성에 대한 세계적인 요구가 커지고 있으며, 자율성을 넘어 제도화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지속가능 보고서 혹은 비재무 정보 공개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기준은 GRI이다. GRI는 1997년 미국 보스턴에서 설립된 기구로 지속가능 보고서의 필수 항목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GRI가 2013년에 제시한 네 번째 가이드라인인 G4를 사용하고 있다. 사회보고를 진행한 우리나라 기업 역시 GRI 가이드라인을 활용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올해 7월 1일부터는 G4가 아닌 변경된 ‘GRI 표준’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 GRI 표준은 기존 G4와 달리 특정 주제에 대해서만 업데이트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이전보다 사회적 변동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성은 36개의 표준과 별도의 용어 사전으로 이뤄졌다. 36개의 표준은 모든 조직에 적용되는 3개의 공통 표준과 경제·사회·환경에 걸친 33개의 특정 주제 표준으로 구분된다.
기업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 정보 공시 필요해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포스코, 삼성 SDI를 시작으로 지속가능 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 및 공공기관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6년엔 총 108개의 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보고서의 99%가 GRI 가이드라인을 활용했다. 발간량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한국 기업들이 내는 지속가능보고서가 국제관행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비재무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일각에서는 정보 공개를 강제하지 못하다 보니 기업의 편의에 따른 ‘보여주기식 공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여기에 한국의 오너 일가 중심의 황제 경영 문화가 더해져 기업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크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자들의 이익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내려져도 제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며, 이러한 폐쇄적 구조하에선 이해관계자가 이익 침해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실례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왜곡된 의사결정을 했으나 이를 인지하고 제지하는 것엔 물리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기업 운영 방식은 기업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소비자·투자자·시민단체·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중심으로 경영해야 한다고 보는 사회책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은 한국 기업들에게 이러한 흐름이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미 ESG관련 정보를 안정적이고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 외국기업과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 소장은 “하드 무역장벽에 대한 준비는 많이 이뤄지는 반면 소프트 무역장벽에 대한 준비는 별로 없다는 것이 아쉽다”며 “국가 정책은 사회적 토론을 통해 세부적인 조정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기업들은 시급히 ISO26000에 맞춰 책임경영체계와 사회보고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전략 수립으로 국제환경 변화에 대응해야
사실 기업의 사회 책임 강화와 비재무 지표 공개 논의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3년 전부터 입법화 시도들이 이뤄졌으며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지난해 3월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법사위와 본회의를 거쳐야 하지만 국회에서 상당 부분의 합의가 이뤄졌음을 추론케 한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기업의 윤리경영, 환경, 지배구조, 인권, 일·가정양립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관한 정보를 사업보고서에 기재 및 공개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9월 취임한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의 “(상장)기업에 저출산 대응 노력, 환경보호, 노사관계 등의 사항을 공시토록 하겠다”는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최 원장은 기업의 비재무 지표를 보다 투명하게 공개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 기업이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투자 판단에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정부 및 국회가 글로벌 수준으로 우리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시 정도를 맞추기 위해 제도화를 준비하고 추진하는 움직임은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비재무 지표 공개 이후를 논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개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어떤’ 정보를 ‘어떻게’ 공개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강충호 한국사회책임협동조합 이사장은 “국제적 수준과 잘 조화하되, 한국적 특성을 반영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적 특성이란 기업이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 한국 기업에게 특수하게 요구되는 사회문제를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산업별, 기업 규모별로 세분화해 꼼꼼한 기준이 제시될 필요성도 제기된다. 금융, 제조, 무역 등 산업 특성 별로 요구되는 비재무적 지표가 다를 수밖에 없고, 종업원 수, 자산 규모 등에 따라 이행해야 하는 사회 책임의 영역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이사장은 이에 덧붙여 “자율이든 의무이든, 명확하고 세밀한 가이드라인이 주어졌을 때 실효성이 극대화할 수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전문가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과 끊임없는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U 의회의 법안 통과에 따라 EU 내 종업원 수 500명 이상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 공시 의무화가 올해부터 적용된다. 사진은 회의가 진행 중인 EU 의회의 모습. 사진/AP·뉴시스
송은하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