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원형의 럭비공을 축구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아란 금융부 기자
이미 손으로 잡고 달리기 쉽게 만들어진 럭비공을 발로 차는 축구공으로 변경한다는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럭비공을 사용하는 미식축구는 축구와 별개의 경기 종목으로 분류되고, 각기 쓰임새와 룰도 다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가상화폐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상대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럭비공’을 ‘축구공’으로 바꾸는 시도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볼모는 시중은행이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의 경우 본인 인증을 거친 은행의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한 탓이다. 앞서 금융당국은 지난 1월 말부터 가상화폐 거래 실명제를 도입했다. 자금세탁을 방지하고 거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조치다.
문제는 당국의 방침이 시중은행으로 하여금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현재 당국은 은행 자율에 맡긴다는 입장이지만,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은행 현장점검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은행권의 속내다.
실제 중소 가상화폐 거래소와 은행 간의 신규 거래 자체가 중단됐으며, 업비트 등 대형 거래소의 신규 거래도 막힌 상태다. 이와 함께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오는 19일부터 농협, 국민, KEB하나은행 등을 대상으로 자금세탁 관련 현장 점검도 진행할 계획이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명확한 법적, 회계적 정비없이 은행을 통해 거래소를 걸러내는 형식의 규제만 취하면서 책임 전가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블록체인이나 가상화폐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규제하기보다 신규계좌 금지 등 은행의 원화입출금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규제가 이뤄진다는 의미다.
더욱이 가상화폐 거래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은행이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가상화폐 거래소가 모여 만든 한국블록체인협회에서 자율적인 규제 방안을 만들긴 했지만, 정부의 기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망명하는 투자자도 발생한다.
홍콩의 바이낸스 등 해외 거래소를 통해서도 가상화폐 투자가 가능하고, 국내에서 금지된 마진거래도 이용할 수 있어서다. 여기에 후오비와 오케이코인 등 글로벌 가상화폐 시장까지 국내에 문을 열며 법인계좌나 가상화폐를 통해 거래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정부가 시중은행을 통한 규제를 시행하는 동안 자본은 해외로 흘러가고,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의 발전은 더뎌지는 셈이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손 쉽게 다룰 수 있는 가상화폐 시장을 만들려고 하기보다 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육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백아란 금융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