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홍·왕해나 기자] 국내·외 경기 악화로 올해 1분기 어닝 쇼크(실적 악화)를 맞은 국내 ‘간판’기업들이 곧바로 비상 경영체제에 들어갔다.
1분기에 이어 2분기에도 실적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자 광고·마케팅 예산 감축 등 전통적 긴축 경영은 물론 제품의 감산 및 생산 중단 등 특단의 대책에 착수한 것이다.
올 1분기에는 반도체, 정유화학, 배터리, 정보기술(IT)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기업들의 실적이 급감했다. 28일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25일까지 실적을 공시한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보다 평균 41.5% 이상 감소했다.
특히 반도체 분야의 실적 부진이 뚜렷했는데, 양대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은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전년 동기의 60%나 감소한 6조2000억 원 영업이익을, SK하이닉스는 같은 기간보다 69% 하락한 영업이익 1조3665억 원을 기록했다. 이 같은 실적 하락은 2년여 간 지속되던 메모리 반도체 슈퍼호황이 끝나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 하락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분기에는 실적 상승을 기대하고 있으나 시장에서는 반도체 시장의 불황으로 반등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는 반도체 업체들의 재고 소진이 지연되면서 가격 하락 압박이 3분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삼성전자에서는 내부에서 조차 올해 실적이 ‘상저하저(上低下低)'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론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사업포트폴리오를 시스템 반도체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더 이상 메모리 반도체에만 안주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인데, 삼성은 ‘미래 먹거리’ 시스템 반도체에 오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외 다른 분야에서는 허리띠 졸라매기에 착수했다.
가전과 스마트폰을 만드는 세트사업부는 올해 들어 두차례나 광고 및 마케팅 예산을 20% 가량 줄였다. 삼성전자 서비스, 삼성디스플레이 등에는 투자에 시급성을 따져 신중을 기하고 고정비용을 줄이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반도체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SK하이닉스는 올해 '감산'에 착수했다. 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올해 D램의 캐파(생산능력)은 늘리지 않고 낸드플래시는 수익성이 낮은 일부 제품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청주 신공장 M15의 생산량 증대(램프업)도 늦춘다.
지난해부터 액정표시장치(LCD) 가격 하락으로 적자의 늪에 빠진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부터 돌입한 비상경영체제를 이어간다. 일부 생산직 직원에 대한 희망퇴직을 실시한데 이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전환에 가속도를 붙인다는 방침이다. LG디스플레이는 올 1분기 영업적자가 1320억이나 났다.
자동차업계는 그나마 올 1분기에 영업이익이 늘면서 체면치레는 했다. 현대차는 8249억원으로 21.2%의 이익 성장세를, 기아차는 지난해 1분기보다 94.4% 증가한 5941억 원을 나타냈다. 그러나 최악을 벗어난 정도로, 2분기 실적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는 올해 글로벌 자동차 수요는 지난해보다 0.1% 증가한 9249만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각각 ‘팰리세이드’, ‘텔루라이드’ 등을 내세워 실적 개선에 나서고 있지만 글로벌 시장 수요 부진에 녹록치 않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또한 국내 시장에서도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수입 브랜드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는 점도 악재로 꼽힌다.
현대·기아차는 중국 시장 부진이 계속되자 내달부터 베이징 1공장, 옌청 1공장 가동을 중단하며, 추가 구조조정 가능성도 제기된다.
인위적인 인력 구조조정 계획은 없지만 정년퇴직 등 자연감소를 통해 2025년까지 20%가량 감축한다는 방침이다.
겨우 회복세를 보인 자동차업계가 넘어야할 큰 산은 노사 문제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23일 소식지를 통해 국회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개정안 처리가 시도되면 총파업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지엠 노조는 파업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30일까지 농성은 계속한다. 르노삼성차는 단체휴가 명목으로 29~30일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5월 2일 협상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강성노조의 파업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면서 시장 회복세에 미칠 영향을 놓고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정부는 안이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업에 대규모 투자와 인력 충원 등을 요구하면서도 노사 문제에는 뒷짐을 지고 있다. 통상 압력 등 대외적 요인에 대해서도 특별한 외교적 노력이나 대책을 내놓은 게 없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6일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의 주된 요인의 하나가 기업투자 부진”이라며 “기업 투자 심리가 되살아나야만 성장흐름의 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여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실적이 좋으면 당연히 투자를 하겠지만 영업이익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대내외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재홍·왕해나 기자 haena0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