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태현 기자] 올해 1월3일 공수처가 윤석열씨 1차 체포를 시도할 때였습니다. 아침에 한남동 대통령 관저 근처에 기자들이 모여있는데 뒤에서 구호들이 들려왔습니다.
'불법영장 원천무효' 같은 여타 구호들은 알아듣는데 거의 문제가 없었는데, 유독 한 구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 겁니다. 다른 기자들끼리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수군댔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아 Stop the steal'이라고?"라는 식으로 말해서 그때부터 알아들었습니다. 이미 그렇게 쓰인 현수막은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활자상으로는 미리 예습한 기자들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가 봐온 바, 기자들이 시위의 구호를 못 알아들어 뭔지 서로 물으면서 수군거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직까지는 마지막입니다.
1월3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근처에 'Stop the steal' 문구가 포함된 현수막이 걸려있다. (사진=뉴스토마토)
'Stop the steal(도둑질을 멈춰라)'은 한국 극우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구호를 따라한 구호입니다.
공화당 소속인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지난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일을 두고 부정선거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부정선거를 가리켜 도둑질이라고 말해온 겁니다.
말하자면 한국 극우가 '수입품'을 사용해오는 겁니다.
이 수입품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패널 같은 활자·글자에는 사용이 굉장히 많이 되는데 극우 시위 참가자들 입에는 거의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위 취재 다니는 동안, 1월3일 아침 관저 근처를 제외하고는 한차례 정도 들은 걸로 기억합니다. 듣고 기억 못한 적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탄핵 무효' 같은 구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뜸합니다.
그렇다면 입에도 별로 올리지 못할 구호를 극우들은 왜 이렇게 활자에 도배를 해놨을까요?
1) 시위의 목적을 생각해봅시다. 여러 사람이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 등을 공공연하게 전달하는 게 목적입니다. 실제로 극우 시위 참가자들은 각종 패널을 인도와 차도를 향해서 많이 치켜듭니다. 그렇게 도둑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기는 할겁니다. 하지만 자기들도 입에 올리기 힘들어하고, 시위 같은 이벤트에 달려드는 게 당연하고 익숙한 기자들조차 처음에는 못 알아듣습니다. 기껏 번역해도 도둑질이라는 단어가 부정선거라는 정치적 이슈를 가리키기에는 아주 직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 유래가 물 건너왔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직관성이 떨어집니다.
2) 미국 사람 보라고 활자에 도배한 거일수도 있습니다. 극우는 국내의 각종 카르텔이 잘못한 게 없는 윤석열씨를 못살게 군다는 자기들만의 세계관을 구축해왔습니다. 한마디로 국내에서는 답이 없으니, 트럼프 지지자 같은 부정선거를 믿는 쪽에게 도움과 연대를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취임 전에는 극우가 트럼프 취임에 기대를 걸기도 해왔습니다. 하지만 미국 사람이 저 활자에 얼마나 반응하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미지수라서 논할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3) 마지막으로 이들이 걸핏하면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것과 같이 놓고 생각해볼수도 있습니다. 성조기는 몇 년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 때부터 등장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극우가 아닌 사람들은 "왜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거야?"라고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극우가 무슨 이유를 대든, 무슨 이유라고 분석이 됐든간에 들고 나오는 이유가 별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극우 자신들의 내면의 심리적 이유가 크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극우는 '내 마음속의 미국'을 떠올리며 시위에 나오는 셈입니다. 왜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지 상당수가 납득을 못하지만 내가 만족하면 되는 겁니다.
어쩌면 Stop the steal도 내 마음 속의 영어 구호일수도 있습니다. 입에 올리기도 힘든 발음이고, 직관적으로 남이 알아듣기 힘들더라도 어떤 이유로든 영어를 패널 형태로 내 손에 품고 내가 만족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영어 계급사회'라는 책이 나온지 한참 됐습니다. 영어가 계급인 상태에서 영어로 '반미 좌파'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다니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그래도 활자로라도 Stop the steal을 많이 활용했으니 익숙해지기는 했을 겁니다. 1월3일보다는 입에 올리는 게 조금이라도 더 익숙해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 겨우겨우 Stop the steal이 익기까지의 과정에서 서부지법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계엄의 명분으로 주장해온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손으로 명분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런 계엄의 명분이라는 것도 결국은 극우 자기들만의 자기 만족이 아닌지, 도둑질이라는 단어만 직관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부정선거라는 주장도 보편성이 떨어지는 주장이 아닌지 본인들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텐데 말입니다.
신태현 기자 htenglish@etomato.com